<기획연재> 한국영화사 훑어보기-5회:<안개>

▲ 영화 <안개> 포스터

 

영화소개 : <안개>, 1967년작, 감독 김수용, 출연 신성일, 윤정희, 이빈화, 이낙훈, 김정철 등

“<안개>는 앞의 작품인 <육체의 길>과 같은 해인 67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보면 당시의 국가권력 담론이 형성해내지 못한 문화적 근대성에 대한 열망의 표출이며 동시에 계급분화와 그에 따른 사회갈등구조를 정당화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서의 지배 이데올로기 확립에 실패한 국가주도의 경제주의적인 근대의 시간에 대한 도피를 보여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 『근대의 시간, 국가의 시간: 1960년대 한국영화, 젠더 그리고 국가권력 담론』 중에서, 김선아

<안개>라는 제목에서부터 우리는 영화가 담아내려고 하는 어떤 불안정한 시대성을 읽을 수 있다. 영화 전체 줄거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장소성인데, 무진과 서울이라는 대립항은 영화의 큰 줄기가 되고 주인공 기준은 이곳을 도피성의 목적으로 왔다갔다한다. 무진은 그런 의미에서 기준에게 향수로 가득한 고향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무진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역의 부산물이 딱히 없이 오직 안개만 가득한 곳이라는 뜻에서의 무진. 기준이 내려가면서 풀어놓는 이 지역에 대한 설명, 그리고 무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모습들은 도피하는 기준을 품어줄만한 고향으로서 무진이 기능하지 못함을 드러내 보인다. 그래서 안개의 마을일 수밖에 없다. 불안정한 현실이 마을 전체에 배어 있고 기준은 자신의 동창, 후배, 새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무진의 변질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무진과 서울이라는 장소의 성질은 전체적인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다. 결국 <안개>는 무진과 서울을 빼놓고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는 구조로 영화가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인물보다도 장소에 담고 있는 의미가 크며, 시대에 따라 그 장소의 의미가 변할 수 있음을 영화 자체에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60년대라는 시대성이 <안개>의 장소에 아주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역시 잘 알 수 있다. 부르주아 문화가 성장해가고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회가 돌아가는 비정상적 구조. 그 기형적 사회 구조를 <안개>에서는 철저히 기준의 시점을 통해 바라본다. 장소 역시 그렇다. 모두 기준의 시점에서 장소가 해설되고 펼쳐진다. <안개>에서의 무진과 서울은 두 개의 도시 그 자체가 아니라 기준의 무진과 기준의 서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소성을 아우르는 기준의 시점이란 무엇인지, 더 나아가 기준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플롯을 만드는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꼭 해설자인 마냥 내레이션을 늘어놓으며 시대성을 고발하는 기준 스스로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따져보는 것이다. 아래의 인용을 보자.

 

 

“<안개>에서 플래시 백 장치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부르주아 남성의 개인적인 기억과 역사 간의 분열과 대조 그에 따른 양가적이며 다의적인 주체성을 표현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플래시 백 장치는 부르주아 계급 남성의 정체성의 분열을 표현하는 것이다. 기준이라는 부르주아 계급 남성은 성장주의, 권위주의, 반공주의를 헤게모니 담론으로 구축한 그 국가의 시간을 벗어나서 자연공동체로서의 무진으로 도피하고자 한다. 플래시 백 장치는 문화와 대립해 있는 자연으로의 회귀욕망 혹은 향수어린 시선의 주체로 부르주아 남성인 기준을 내세운다. 플래시 백은 기준의 시점으로 철저하게 봉합되어 있다. 과거를 소환하는 주체는 윤기준이며 그것은 분명 할 일 없이 농촌(무진)에서 화투나 치던 과거의 기준과는 달리 이제는 부르주아 계급에 귀속되어 있는 기준의 시점인 것이다.” - 『근대의 시간, 국가의 시간: 1960년대 한국영화, 젠더 그리고 국가권력 담론』 중에서, 김선아

시대를 움직이는 계층으로서 부르주아, 그것도 남성 부르주아로서의 기준은 사실 시대적으로 보면 대단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그가 무진에서 극진한 대접을 여기저기서 받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무진이라는 하나의 도시를 대표할 수 있을 정도로 기준은 성공한 인물이고 성장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정점에 올라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당히 모순적인 것은 그런 시대적 정점에 놓인 인물이, 다 내려놓고 자연으로 회귀하기 위해 도피해온 곳이 바로 무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모순인 것은, 도피해온 기준은 정작 부르주아로서의 대접에 상당히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미 그는 부르주아로서의 삶에 길들여졌고 당연히 부르주아의 시각으로서 무진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 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서울에 비해 무진이 얼마나 낙후되고 천한 장소로 여겨졌겠는가. 서울이 갖는 근대성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아래의 인용에 나와 있다.

“거대 도시로 변모한 67년의 서울은 그것이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거대화되었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기능적으로 움직이는지를 묻지 않는 자본집약과 고도성장의 기치 아래 탄생한 생산력 중심의 물화된 공간으로 제시된다. 딸 쌍둥이를 낳았다는 택시 기사의 대사가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초반부의 이 장면들은 서울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의 행위자들이 바로 사회적인 영역, 가내의 영역 할 것 없이 생산력 향상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성장주의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근대의 시간, 국가의 시간: 1960년대 한국영화, 젠더 그리고 국가권력 담론』 중에서, 김선아

서울이 근대성의 정점에 있는 장소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리고 또한 부르주아 계급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것은 곧 모든 권력과 권위가 집결되어 있는 장소가 서울이라는 의미이다. 무서운 것은 서울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다. 사실은 성장주의라는 단어만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울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상당히 복합적이다. 한편으로는 계급주의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본지상주의적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진보주의라는 좋은 기치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중에 하나의 모습으로 성장주의가 작용하는 것이겠지만, 기준이라는 부르주아적 시점에서 성장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그를 그 자리에 있게 만들어준 배경이기도 하다. 기준은 서울만 벗어나면 성장주의에서 잠시 피해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시점에서 바라본 서울은 그 이데올로기의 시작이자 끝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그가 마주하게 된 무진이라는 장소성이 그의 환상을 모조리 깨뜨리고 만다. 아래의 인용에서 무진의 의미를 살펴보자.

“자연이자 과거이고 정신적 세계이며 신화적 공간인 무진은 이미 근대의 시간에 포섭되어 훨씬 더 폭력적인 양상을 띠는 장소로 재현된다. 민족국가에서의 근대적 삶에 있어서 그것을 벗어난 유토피아적 공간이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준을 전형으로 한 부르주아 남성을 통해서 작동하는 상징의 위계질서가 형성되는데 그것은 바로 근대의 질서는 중심(도시)을 모방하는 주변(시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지정학적 분류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항상 후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 『근대의 시간, 국가의 시간: 1960년대 한국영화, 젠더 그리고 국가권력 담론』 중에서, 김선아

근대의 질서라는 공식은 무섭기까지 하다. 그 질서에 맞게 시골 ‘무진’은 무조건 줄을 설 수밖에 없다. 서울이 맨 앞에 줄을 섰으니 그 뒤편 어디라도 무진은 줄을 서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은 기준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두 장소간의 성질이 얼마나 시대성을 잘 드러내고 심지어는 성장주의와 무비판적 근대화라는 당시의 사회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는지 알 수 있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도피를 온 부르주아에게 유토피아란 없다. 결국 무유토피아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원동력으로 삼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끝이 안 보이는 성장 곡선? 만약에 그 곡선이 멈춰버린다면, 서울과 무진 역시도 멈출 것이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멈춰버릴 것이다. 그것은 잔인한 파멸이다. 근대는 파멸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무비판적 근대화라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공식화되어버린 성장은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된다. 부르주아의 위치에 있는 계층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막으려 들지 않는다. 무진이라는 공간에서 천민 자본주의적 행태가 난무해야만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계급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준은 변화를 꾀하려고 무진을 들르지 않고, 오직 자신의 도피만을 위해 무진을 들렀다. 무진에서의 만남, 무진에서의 사랑, 무진에서 목격한 죽음과 과거까지도. 모두 기준의 도피와 재충전을 위한 제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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