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국의 GMO 재앙을 보고 통곡하다’ / 오로지(GMO 문제 전문가)

한국이 GMO를 수입하기 시작한 90년도 중반부터 여러 가지 질병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자폐증 발병률 세계 1위, 대장암 발병률 세계 1위, 자살률 10년 넘게 세계 1위, 당뇨병 사망률 OECD 국가중 1위, 유방암 증가율 세계 1위, 치매 증가율 세계 1위, 선천 기형아 6.92%, 성조숙증 여아 7년간 27배 증가, 만 1살 영아 빈혈 12년 사이 7배 증가, 말기 신부전환자 20년간 15배 증가, 비타민 D 결핍증 5년 사이 9배 증가, 아토피 피부염 환자 600만명, 4명중 1명이 정서·행동 장애 아동 등. 한국이 식품 GMO 수입이 세계 1위인 점과 질병 증가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점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글은 과학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GMO가 질병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나아가서 피해야할 음식들과 GMO 대응책을 제안한다. GMO 문제 전문가 오로지 씨가 쓴 글 전문을 시리즈로 게재한다. (지면관계상 주석은 생략하기로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신채호 선생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프레드리히 헤겔(Friedrich Hegel)

“한국 기업의 위기관리 능력은 C학점 수준입니다.” 홍보 자문회사인 포터 노벨리(Porter Novelli) 본사 총괄사장인 캐런 반 버겐(Karen van Bergen)이 한 말이다. 버겐은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이후의 위기관리를 예를 들어 한국기업의 문제점을 얘기한다.

한국기업이 ‘C’ 학점 수준이라고 한다면 역사 속에서의 한국의 위기관리 능력은 어떤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필자는 한국의 위기 인식, 관리능력이 ‘F’라고 본다. 특히 위기가 심각할 때일수록 한국의 위기 인식, 관리 능력은 더욱더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가장 좋은 예가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에서 왕은 물론 온 국민이 수모를 당한 원인으로 흔히들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의 엇갈린 정보 보고를 지적한다.

정사는 서인 황윤길이었는데 왜군의 침략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상소했지만 동인 부사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이 김성일 한사람의 잘못된 보고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진정한 원인을 파악하는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는 징조는 임진왜란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부터 나타났다.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일본 최고의 통치자가 된 직후 쓰시마의 지배자인 쇼 요시토시에게 조선국왕의 항복과 복속을 받도록 요구한다. 쇼 요시토시는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1587년 9월 조선에 보낸다. 하지만 야스히로는 그러한 요구를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훤히 알고 있었다. 류성룡은 야스히로의 난처함을 잘 알고 있었다. 야스히로는 귀국 후 처형당한다.

히데요시는 1588년 조선의 항복을 받고자 사절을 다시 파견한다. 1589년에는 쓰시마의 지배자 쇼 요시토시가 직접 건너와서 히데요시의 항복 요구를 또다시 전한다. 그 다음해 조선조정은 일본에 통신사(황윤길, 김성일, 허성)를 파견한다.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침략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조선의 복속을 요구하는 내용의 국서를 통신사에게 전달한다.

상황이 이쯤 되면 즉시 전쟁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김성일의 부적절한 발언 하나가 조선조정의 어처구니없는 정책의 변명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당파싸움도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수많은 백성들의 고통과 죽음뿐만 아니라 회복될 수 없는 주권 상실의 가능성을 뜻한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1%만 있었더라도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류성룡같은 뛰어난 조정의 대신도 1만 명 정도의 왜군이 침범할 것이라고 추측했고 나중에 이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일본은 16만 명의 대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거기에 반해 조선의 정예군 숫자는 2만3000명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전투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병력은 불과 8000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보조역할에 그칠 뿐이었다.

4월 14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18일 만인 5월 2일 한강 방어진이 무너진다. 막강한 일본군에 맞설 방어 능력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이 대규모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범하려는 의도는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미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큐슈의 나고야를 히데요시는 출항지로 선택하고 성을 구축하였다. 총동원된 일본군수는 30만 명에 이르고 2000여 척의 전함이 구축된다. 1591년 12월에는 48만 명분의 1년치 군량과 군수물자가 모아져서 전쟁준비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의 거대한 전쟁준비에 대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몇 년 전 KBS에서 ‘징비록’이라는 역사드라마를 방영하였다. ‘징비록’은 류성룡이 관직을 떠난 후 저술한 임진왜란에 대한 회고록이자 반성문이며 무엇보다도 후세에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남기는 경고문과 같은 것이다. 과연 그의 경고는 얼마나 반영되었을까?

류성룡의 경고문이 쓰여진 지 300년이 채 안돼서 조선의 안보 불감증으로 인한 비극이 또 다시 일어난다. 때는 19세기에 세계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기이다. 영국에서 비롯돼 다른 서구국가들로 번진 산업혁명은 의류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가지 질좋은 제품을 싼 값에 대량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서방국가들은 그 제품들을 이용, 다른 국가들과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한다. 1860대 후반 프랑스와 미국이 강압적으로 개방하게 하려 했지만 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막아낸다.

일본은 1854년 이미 미국에 개항을 한 뒤 개혁을 시작하여 경제적, 군사적, 기술적으로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그 발전된 능력을 바탕으로 다시 조선 침략을 계획한다. 그들의 치밀한 계획은 강화도 조약에서 나타난다.

1876년 7월 6일 조선과 일본 간에 맺어진 무역장정의 내용중 ‘통과세 0%, 수출세 0%, 수입세 0%’라는 조항이 있다. 당시 자유무역을 표방하던 영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은 자국산업의 보호를 위하여 보호무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관세 무역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조약은 조선이 세계정세를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관세 없이 들여오는 사치품들을 팔아서 벌어들인 돈으로 일본상인들은 쌀을 구입했다. 그래서 항구를 개항한 1876년엔 쌀값이 2배 이상 폭등하게 된다. 사치품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주식인 쌀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이는 경제안보 불감증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강화도 조약의 항목 중 또 하나의 큰 실수는 10조에서도 드러난다.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이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결국 이것은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이 어떠한 범죄를 저질러도 아무런 제재를 못한다는 것이고 이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국제사회에는 치외법권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특권은 외교관에만 주어지는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후 ‘정한론(조선을 정복하자는 논의)’과 ‘점진론(당장 조선을 치기보다는 일본이 조금씩 힘을 키워나가면서, 조선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자는 논의)’이 지도층 사이에서 논의된다. 이러한 와중에도 조선은 일본의 침략의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빨리 적응을 못하는 것이 우리민족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큰 실수를 하는 것도 우리의 고질병이다.

지금 한국에서 폭발적으로 급증하는 질병을 보면 임진왜란, 그리고 조선말 강화도 조약 이후의 위태로운 상황이 떠오른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안보불감증 때문에 많은 곤욕을 치렀다. 국방문제도 그렇지만 안보문제는 되돌릴 수 없는 크나큰 위험을 불러온다. 식량안보, 국민건강, 인구유지 등이 그렇다. 우리민족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멸되었을 때에야 GMO의 위험성을 깨닫는 비극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은 진작부터 들어온 다국적 기업들이 로비 활동을 통해 한국국민이 위기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방해공작을 벌이고 있는 데서부터 비롯됐다. 독을 먹이면서 돈을 벌기위해서는 충분한 속임수가 필수적인데 한국에서는 그러한 방법이 잘 먹혀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전쟁과 바둑도 그렇지만 인간의 몸에도 급소가 있다. 급소를 잘 지키지 않으면 다른 어떤 부분에서 잘하더라도 패배와 파멸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GMO 작물을 수입하는 것이 바로 악랄한 다국적기업들에게 우리민족의 급소를 맡기는 것과 다름 없다. GMO 작물 수입뿐 아니라 몬산토 등이 한국의 종자회사를 대거 인수하게 한 것도 나라의 급소를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은진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래서 토종씨앗 나누기 운동을 하고 있다.

19세기 중엽에 일어났던 아일랜드 대기근이 식량을 무기로 사용한 좋은 사례다. 아일랜드에서 100만 명이상의 사람들이 죽었고 또 1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해외로 이주했다. 역사학자 팀 팻 쿠건(Tim Pat Coogan)은 아일랜드 대기근은 영국정부에 의한 의도적인 대량햑살이라고 주장했다.

또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인 1870년에서 1910년 사이에도 3000만 명이 기근으로 죽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당시(1942‐1945년)에도 600만 명 이상의 인도인들이 기근으로 사망했다. 이것을 뱅골의 홀로코스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드허스리 무커지(Madhusree Mukherjee)는 처칠 수상에게 인도 기근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인도인들이 기근으로 사망하고 있을 당시 엄청난 양의 쌀을 인도로부터 수출한 것이다. 그런데 인도가 독립을 하고 나서는 그런 비극은 더 이상 없었다. 이러한 예를 보면 식량 주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한국역사에서 반복되는 막중한 실수의 원인은 상대를 너무 쉽게 믿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를 침범할 의지가 없으니까 다른 나라도 우리를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이 한국역사의 비극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게 독이든 음식을 판다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국적 GMO 회사들도 우리에게 독이 든 작물을 팔지 않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이 우리민족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재앙만이 기다릴 뿐이다. <기사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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