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장흥 갯길 따라- 해창리 당집과 당제

▲ 누군가의 이름보다 꽃이 먼저 다가든다. 당집 앞에 세워진 공덕비(부분)

‘해창(海倉)’이란 이름은 이곳이 한때 번창하고 은성한 포구였다는 것을 증거하는 지명. 서남해안 지역 곳곳에 해창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장흥엔 안양면에 해창이 있다.

“우리 마을이 굉장히 오래된 동네여. 조선시대에는 고을마다 해창을 두고 거그서 지금으로 치문 세금인 쌀이랑 곡석(세곡․稅穀)을 배로 실꼬 한양 마포까지 갔어. 우리 마을이 그런 디여. 긍께 당제를 엄중하게 모셨제. 배가 바리바리 실고 간께 해상사고 안나게 해달라고 비는 거여.”

뱃길의 무사안전을 비는 것이 무엇보다 중했던 해창. 마을의 최고연장자인 이성환(91) 할아버지는 그 전통이 이어져 당제가 크고 성했던 시절을 기억한다.

“정월 초사흘이문 돼지잡고 고사 모시고 메구치고 거하게 지냈제. 지금은 그런 풍속이 다 허물어지고 없어. 옛날에는 섣달 그믐부터 금줄 치고 초사흘까지 일절 통행금지여.

당집, 당산나무, 선창뿐만 아니라 마을 여러 반디서 지냈제. 지금도 당제를 하기는 헌디 형식적이여. 서운해도 어쩌겄소. 세상 따라간디로 살아야제.”

홀로 떨어진 자리인데다 사뭇 범접하기 어려운 여느 당집과 달리 해창리 당집은 마을 고샅 한가운데 한 이웃인 양이무롭게 섞여 있다. 당집의 외형도 소박한 창고에 그저 지붕을 올린 모양새다. 이채로운 것은 ‘영세불망비’ 같은 각종 비석들이 한데 모두어져 이 당집의 울타리를 이루는 모습. 돌뿐 아니라 쇠로 된 비석도 있다.

 

▲ 이웃집인 양 이무롭게 고샅에 자리한 해창리 당집

 

이성환 할아버지는 “해창이 부자마을이었제”라고 회고한다.

“일제때도 여그서 일본까지 가는 화물선이 있었고 군산 목포 여수 울산까지 화물선이 다 일로 들왔어. 남해고속도로 생긴 뒤로 해상운수가 없어져 불었어. 그전엔 뭐이든 여그로 들왔어. 해창쌀은 특미로 들어가. 긍께 해남 강진사람 쌀도 여그로 들왔어. 해창서 왔다 하문 특미로 들어간께.”

지난 시절의 수런수런함은 ‘해창’이란 이름에만 희미하게 묻어 있고, 마을은 봄볕 속에 한적하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최성욱 다큐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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