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김유철 칼럼

▲ 수목한계선을 넘어선 곳이기에 나무는 없었다. 멀리 보이는 것이 모두 백두산 봉우리이고 가운데가 최정상인 장군봉이다. (사진=김유철) 

 

그해 여름 평양에서 백두산을 가다

꼬박 10년 전 뜨거웠던 한여름을 생각한다. 그해 여름 난 평양에 있었다. 그리고 평양에서 비행기를 타고 개마고원에 위치한 삼지연공항에 내려 백두산 천지에 올랐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콘크리트 같은 국호나 북한이라는 메아리 없는 소리가 아닌,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그곳에서 난 서성대고 있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우린 아직 두 동강 허리다. 누가 그 아픔을 달래려 기도하고 있는가? 그 날 아침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평양에서 이륙한 작은 비행기가 삼지연공항에 내렸다. 그들은 그곳을 량강도 삼지연군이라 불렀다. 한반도를 대륙과 구별하여 동과 서로 흐르는 두 강. 압록강과 두만강이 서로 갈라져 흐르는 시작점이기에 량강도라 불렀다. 두음법칙이 사라진 발음도 낯설었지만 그보다는 수도 없이 듣고 입으로 불러봤을 성 싶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어색했다. 마치 낯가림 심한 혼기 놓친 남녀가 처음 상견례를 하는 어색함이었다.

 

살아서 숨 쉬던 압록강과 두만강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 강을 살아있는 형태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설레는 어색함은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배여 있는 어색함이었다. 8월 삼복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말복이었다. 방북일행들과 함께 그곳에 내가 서서 숨을 들이켠 것은 바로 그 날이었다. 허파의 복잡한 조직세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것은 텁텁한 공기가 아니라 서늘한 공기였다. 아니 그것은 바람이었다. 바람.

비행기 트랩에서 사방을 돌아보니 멀리 눈에 익은 봉우리가 보였다. “백두산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가슴이 먼저 외쳤다. 가슴이 사람 말 하는 것을 처음 느꼈다. 비행장 주변은 키 큰 편백나무가 빙 둘러 사열을 했다. 삼지연 공항은 시골 간이역보다 더 작았다. 왜 갑자기 그곳에서 콘서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순전히 ‘간이역’이란 단어 때문일 것이다. 삼복 중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는 말복인데 이곳의 공기는 서늘하다. 아니 가슴이 뻥 뚫리는 상쾌함이었다.

 

▲ 백두역에서 출발한 삭도에서 바라본 개마고원 정경이다. (사진=김유철)

민족화해의 길은 늘 요동쳤다

생애 두 번째로 평양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처음은 민족화해위원회가 지원한 콩우유 공장을 보러간 것이고, 그해는 병원지원과 아동교육장 방문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방문을 전후한 국내외의 사정은 급물살속에 있었다. 민족화해의 길은 늘 요동쳤다. 그래도 가야 했다. 그래서 염원했고 성사가 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간절해질 수 있게 한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헤아릴 수가 없다. 평양이 고향이었던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아버지.

금성학원이란 곳은 남쪽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방과 후 특기적성수업을 전담하는 곳이다. 평양학생문화궁전 뒤에 자리 잡은 큰 건물이었는데 방북 기간 동안 가고 싶은 곳 중의 하나였다. 북의 청소년들을 직접 볼 수 있고 그들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남쪽 예술학교처럼 교실 곳곳에서 성악과 악기, 발레 등을 수업하고 있고 컴퓨터 실습교육을 참관했다. 그리고 강당에서는 방문단을 위한 공연이 펼쳐졌다.

청소년과 창밖의 사람들

복도를 지나가는 여학생을 무작정 붙잡았다. 북에서 이런 행동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남쪽사람과 사진 찍는 학생들은 따로 정해져 있었다. 아이에게 몇 학년이냐고 물으니 중학교 1학년입네다”하고 대답을 한다. 아이에게 잘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두 손을 아이의 머리에 올려 주었다. 집에 있는 두 아이와 그 또래 아이들이 생각났다.

남이나 북이나 어른들보다는 청소년들이 곧게 커야 한다. 어른들의 말도 안 되는 다툼과 논리에 익숙해지지 않고 그들의 세상은 푸른 하늘만큼이나 자유롭고, 흐르는 강물만큼이나 거침없는 평화가 왔으면 정말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시내를 오가며 만났던 창밖의 사람들은 나를 침묵으로 빠져들게 했다.

 

▲ 평양냉면과 녹두전을 평양 옥류관에서 만났다. (사진=김유철) 

아이들을 보며 그저 미안했다

다시 북의 젊은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곳은 놀랍게도 백두산 천지였다. “고등학생입니까?”라고 물으니 “아닙네다, 대학생입네다”라고 학생이 대답했다. 북쪽 일꾼이 청년동맹 단원들이 여행 온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 학생들이 천지로 내려가는 삭도(케이블카)를 기다리고 있었고, 부모와 함께 온 것처럼 보이는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아마도 아이들은 한 눈에 남쪽에서 온 사람인 것을 알아차린 눈빛이었고 말로 표현될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릴 살폈다. 그저 미안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백두산 정상에 오르니 앳된 인민군 병사가 보였다.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빛이었는데 일행이 내려갈 즈음에는 얼굴에서 긴장이 많이 풀어져 있었다. 용감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병사의 손을 잡았다. 20살 남직한 군인의 손은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또 만나자고 말하며 돌아서는 순간 그가 나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인민군의 경례!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다. 나는 그를 향해 씩 웃어주었다. 그도 경례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웰컴 투 동막골>이란 영화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하늘이 담긴 백두산 천지 (사진=김유철) 

백두산 천지에 담긴 하늘빛 물

사람들은 백두산의 천지를 무슨 색으로 기억할까? 천지에 담겨있던 물은 색이 아니라 빛이었다. 백두산을 다녀온 지 10년이 지나도 입을 제대로 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물에 감돌던 빛 때문이었다.

하늘을 담은 물이 아니라
하늘이 담긴 물입니다
헤아릴 수 있는 시간의 사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공간입니다
사시사철 형형색색이 아니라
그저 오롯한 빛입니다
사람 소리 끊어진 그곳
비로소 하늘소리 시작입니다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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