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남미여행기-열 번째 이야기 / 강진수

19.

마추픽추를 다녀오느라 몸이 피곤해져 있었음에도 달리 쉴 겨를이 없었다. 볼리비아 국경을 넘어가는 일이 곧 닥쳐왔으므로 서둘러 쿠스코의 생활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래도 마추픽추만을 보고 쿠스코를 떠나기에는 너무 아쉬워 근교에서 할 만한 다른 투어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문득 한국에서 남미 여행지를 이것저것 알아보던 중 쿠스코 근교에 무지개산이 있다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핸드폰을 뒤져보니 그 무지개산 이름이 비니쿤카라고 메모도 되어 있었다. 얼른 호스텔 카운터로 가서 혹시 비니쿤카 투어가 있느냐고 물어보았고 직원은 투어사와 우리를 연결시켜 주었다. 자리도 남았다고 하고 중요한 것은 투어 경비가 당일치기라서 그런지 별로 부담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투어를 가기로 결정했다.

비니쿤카를 가기로 한 아침에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많은 양의 비까지는 아니지만 등산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리는 비라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호스텔 한가운데에서 코카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는데 투어사 직원이 와서 우리를 픽업했다. 직원을 따라 광장 쪽으로 내려가자 꽤 커다란 투어 버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첫 번째로 온 우리는 일찍이 편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주섬주섬 가져온 아침거리를 꺼내 먹었다. 기껏 해봐야 빵 몇 조각에 물 한 병이었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침을 꼬박 챙겨 먹는 것은 여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텅 비어 있던 버스가 조금씩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비니쿤카라는 산이 얼마나 높은 지, 얼마나 험한지도 전혀 모르고 있던 상태라 조금 걱정하고 있었는데 꽤 나이가 드신 분들이 여럿 버스에 올라타시는 것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 그들과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네받았다. 그들도 차에 올라타자마자 먹을 것을 챙기느라 한참을 부스럭거렸다. 사람들을 가득 채운 버스는 금방 출발했다. 버스가 쿠스코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나와 형은 무슨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잠에 빠져 들었다. 한숨 자고 나면 도착해있을 것이다. 그래도 버스가 크고 편안한 좌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좁은 콜렉티보에서 서로에게 기대며 괴롭게 잠에 들던 하루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이번 여행에도 점점 무뎌져 가는 구나 싶었다. 무뎌져 가는 것이 좋은 것이다. 항상 사람이 날이 서 있다면, 금방 지쳐버리게 마련이다. 앞으로 또 무슨 일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주어진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려는 자세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희미한 풍경들이 반쯤 뜬 눈 앞에 펼쳐졌다. 온통 푸른 초원과 높게 치솟은 산, 그 초원을 뛰놀고 있는 라마와 알파카 무리들의 모습뿐이었다. 구불구불 나있는 산길을 따라 버스는 속도를 냈다. 버스 기사가 깊이 잠든 사람들을 깨우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꾸물꾸물 움직여 버스에서 내린다. 내리자마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선한 공기가 내 폐부를 스쳤다. 잠이 확 달아나고 말았다. 풀밭은 금방 내리고 간 빗줄기에 의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 흙냄새 가득한 길을 천천히 걸어 베이스캠프로 이동했다. 다 쓰러져 갈 것만 같은 오두막. 저 곳이 바로 우리의 베이스캠프다. 영문도 모른 채 베이스캠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들의 어색한 웅성거림이 멎지 않았다.

 

 

“저는 여러분의 트래킹 가이드입니다.” 등산 장비를 철저히 갖춘 가이드가 베이스캠프 한가운데에 섰다. 그는 스페인어로 등산 코스가 어떻게 되고 얼마간 이동할 것이며, 언제 비니쿤카에 도착해서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올 것인지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나와 형은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니까 그냥 눈치껏 자리에 계속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차를 타고 비니쿤카라는 관광 명소를 한 바퀴 둘러보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트래킹이라니. 마침 나는 트래킹화를 신고 왔지만 형은 심지어 흰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우리는 그제야 우리의 앞길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과연 험난한 이 산지의 트래킹을 우린 해낼 수 있을까. 바보같이 생각 없기는 여전하구나. 서로가 서로를 질책하며. 그런데 이상하게 뛰는 이 가슴은 왜 그럴까. 꼭 모험을 앞두고 설레는 것처럼 말이다.

 

20.

가이드가 브리핑을 마친 뒤 외국인이 있으면 손을 들라고 했다. 나와 형을 포함한 외국인 무리들은 스페인어를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따로 모여 영어로 브리핑을 다시 받았다. 생각보다 산은 높고 가야할 길은 멀었다. 할 수 있을지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가이드는 말했다. “챔피온!” 우리 트래킹 팀의 이름이란다.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가이드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뭐 어쩌겠는가. 이미 여기까지 와버렸다. 힘들더라도 이 악물고서라도 비니쿤카를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브리핑을 받고 다시 자리에 앉자 꼭 최후의 만찬처럼 아침 식사가 상에 차려졌다. 그렇다고 대단한 음식들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차와 커피, 그리고 갓 나온 빵과 잼은 우리에게 충분한 만찬이었다. 사람들은 아침 식사를 마주하게 되니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주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와 형도 같은 식탁에 앉게 된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어머니를 모시고 온 페루 여자분, 그리고 독일에서 온 에이미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영어를 할 수 있을뿐더러, 에이미는 상당한 영어 실력자인지라 오랜만에 마음 놓고 대화에 임할 수가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을 완전히 알아듣고 대답해주는 사람이 대체 이 땅에 와서 얼마만인가.

 

 

한참동안의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모두 트래킹 장비를 갖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미와는 그새 각별해져서 함께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산세가 조금 험한 지라 등산용 폴도 지급받았다. 갈 준비를 모두 마친 우리의 모습은 꼭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반지 원정대 같았다. 뭔가 대단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결의를 다지는 원정대처럼, 우리는 출발 전에 큰 소리로 팀명을 외쳤다. “챔피온!” 힘차게 외치고 조그만 언덕에 오르자마자 안데스 고원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폴로 용맹하게 땅을 내리찍으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천천히 걸었다. 이곳은 이미 해발 3000~4000미터가 넘는 곳이므로 뛰거나 오버페이스를 하게 되면 고산병 증세가 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없다. 이미 하얗게 만년설이 쌓여있는 안데스 산들의 모습이 내 가슴을 간질였고, 무지개산이라는 그 신비한 광경을 보고야 말겠다는 나의 오기가 작동해버렸다. 얼마나 나를 설레게 하는 미지의 세계인가. 심지어 새로운 친구를 얻고 셋이 되어 산을 오르니, 나는 전혀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오직 우직하게 걸을 뿐이다. 천천히, 우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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