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인연들이 이 터전을 갈고 닦아
소중한 인연들이 이 터전을 갈고 닦아
  •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
  • 승인 2018.06.0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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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산골마을 이야기 - 고창 성송면 학천리 추산마을
▲ 추산봉 자락에 위치한 추산마을. 예전에 사람들이 많았을 때는 25가구도 넘었지만 지금은 여덟 집만 산다.

 

고창에서 영광으로 가는 23번 국도변의 제법 넓은 들판을 가로 질러 달리다 왼쪽을 보니 우뚝 솟은 산이 보인다. 국도를 벗어나 마을로 들어서니 입구에 ‘어림 추산’이라고 각한 마을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마을로 들어서니 길은 추산봉(秋山峰)을 향하여 길게 늘어서 있다.

고창군 성정면 학천(鶴天)리 추산(秋山)마을이다. 마을 뒷산이 추산봉이라 거기서 딴 이름이다.

“원래는 저울 추(錘)자였는디 왜정 때 가을 추(秋)자를 썼다고 그래.”

마을 입구에서 만난 조재현(73) 할아버지가 마을 이름의 유래를 묻자 정확하게 말씀하신다.

“저기 포크레인이 공사허고 있는 디가 왜정 때까지만 해도 숲이 울창했다고 흐더만. 그래서 마을 지형이 배를 띄워 놓고 낚시허는 것 같다고 해서 조동(釣洞)이라고 그랬어. 근디 왜놈덜이 어림(漁林)으로다가 바꿔부렀다는 거여. 아따 좋은 흙 다 퍼 가부네.”

아니나다를까 추산마을 앞 어림마을 뒤의 야트막한 동산에서는 트럭이 붉은 황토를 퍼내고 있다.

 

▲ 추산마을 입구에 선 지은(知隱) 최전구 선생 추모비.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였고, 이듬해 면암 최익현과 함께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분이다.

일제에 항거했던 지은(知隱) 선생의 자취

마을 입구 널찍한 벼락바위 앞에 1965년 세운 비가 하나 있다. ‘正憲大夫義軍府巡察使昭慶園 參奉智隱崔公諱銓九追慕碑’. 지은(知隱) 최전구(1850~1938) 선생 추모비다. 더듬거려 읽어보니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였고, 이듬해 면암 최익현과 함께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분이다.

“이 어르신이 대단헌 분이여. 일본 순경도 꼼짝을 못했다고 그랴. 어찌나 강직했던지 말여. 우리 동네 자랑인 어른이제. 나도 잘 모르제만 어른들이 들려준 얘기로는 일본놈들이 뵈기가 싫은께 추산봉으로 올라가서는 내려오덜 안했다고 해. 밥도 굶고 있응께 왜놈들도 어쩌지 못했다고 해. 거기서 움막을 짓고 살면서 나라 잃은 원통흔 맘을 달래다 가셨다고. 훌륭한 어르신이제. 돌아가시자 만장이 만리까지 길게 늘어섰다고 그래. 하도 문상객이 많으니까 그 돈을 광주 현부자라고 하는 양반이 모다 대 줬다고 해. 지금은 없어져 부렀지만 30여 년 전만해도 망오제라고 해서 그 어르신 제사를 모시는 날이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어.”

 

▲ 추산봉에 있는 ‘知隱崔先生望梧壇(지은최선생망오단)’ 비.

 

추산봉에 망오대(望梧臺)를 쌓았다는 내용이 있어 혹시 장소를 아시느냐고 조재현 할아버지께 여쭈니 뒷짐을 짓고 천천히 앞장을 서신다.

추산마을은 예전에 사람들이 많았을 때는 25가구도 넘었지만 지금은 8호뿐인 작은 마을이다. 추산봉 자락에 위치한 마을은 서쪽으로 드넓은 벌판을 끼고 있어 바라보는 눈맛이 시원시원하다. 멀리 계양골 새터골까지 보인다. 벼락바위 끝에는 옹달샘 물이 찰방찰방 흘러 넘친다.

“동네 시암인디 예전에는 이 물로 다 살았어. 지금까지 물이 말라보덜 안해.”

“저 터가 다 옛날에는 집이 있었던 디여.”

마을 뒤 추산봉으로 올라가는 길가는 모두 빈터다. 지금은 모두 떠나고 빈터만 남아 있다.

“저 길로 올라가면 되아. 난 더 이상 못가.”

 

▲ -“동네 시암인디 예전에는 이 물로 다 살았어. 지금까지 물이 말라보덜 안해.” 조재현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마을 뒤 대나무 숲길을 걷다가 손으로 가리킨다.

“쭈욱 따라가. 마침 며칠 전에 전직 군수가 우리 동생흐고 와서는 거길 가겄다고 해서 동생이 길을 내 놨어.”

혼자 걸어올라 가다 보니 시누대숲이 나온다. 헉헉거리고 30여 분 추산봉을 올라가니 ‘知隱崔先生望梧壇’ 비가 서 있다. 1981년 신유년에 세웠다. 큰 너럭바위에는 ‘知隱崔先生望梧壇’이라고 음각으로 새겨져있고 그 옆 바위 면에는 고종 승하 당시 망곡(望哭)하였던 지은 최전구 선생을 비롯한 15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대숲으로 우거져 있지만 당시에는 멀리 서해까지 보였을 터이다. 지은 선생은 이 단 위에 올라 북향하고는 고종께 문안을 올렸고 승하 때에는 날마다 목놓아 곡하였다고 한다.

바위 앞에는 선생이 마셨다는 작은 샘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최참봉 샘’이라고 부른다. 숨차게 올라오면서 목이 말랐는지 샘물이 정말 달다.

 

▲ 마을 고샅. 손맛 느껴지게 쌓아올린 돌담들이 정겹다.

추산봉 맑은 기운 받아 이룬 마을

하산하여 마을 골목길을 걷는데 봄 햇살이 가득하다. 돌담이 정겨워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담장 안에서 할머니가 “멀 그리 찍어쌌소. 그리도 좋으요”라고 웃으며 묻는다.

“우리가 사는 것이 그래. 여기 있던 돌이랑 흙이랑 써서 맹근 거여.”

마을 앞으로 나가니 1990년에 주민들이 세운 ‘漁山矯風會紀念碑’가 있다.

 

▲ 고샅에 오명가명 보는 꽃. 여럿이 보려 그 자리에 꽃 피워낸 그 마음이 아리땁다.

 

‘노령산맥이 남으로 뻗어오다가 동방의 정기 뭉쳐 추산봉이 우뚝 솟고 그 산 맑은 기운 받아 반촌을 이루었으니 어림과 추산이라 사시사철 꽃피고 새 우는 아름다운 충광 기름진 옥토에 철따라 노랫가락 들었더라 서로가 빛나는 예와 지와 고운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였고 수양과 실천에 있어서 매우 敦篤하고 이웃에 있어서 항상 이로움으로 소중한 인연들이 이 터전을 갈고 닦아 오기 수백 년이었고 또 지켜가기 억겁일러라 어찌 효제충신의 미덕과 상부상조의 미풍을 계승 진작시켜 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없으리오…(중략)…장하도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무성하고 근원이 먼 샘은 흐름이 길다는 것은 영원한 이치다. 아 하늘을 우러러 보노라 아름다운 자손이 어버이들의 유지 따랐으니 임들은 영원히 존재하도다 이에 비문을 각인하여 그 광채를 더하고자 하노니 고향과 더불어 끝이 없으리라’

고향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끝이 없다. 뒤돌아서 다시 마을을 보니, 추산봉 아래 추산마을이 아련하다. 무장에서도 새벽밥 먹고 와서 나무를 해 갔다는 추산봉. 그 아래 추산마을의 봄날이 지나가고 있다.

글·사진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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