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극도로 어려운 상황. 11살 어린 나이의 머슴살이 소년은 모든 게 힘들어졌다. 하루 세끼를 먹기 위해 자처한 머슴살이 생활이었지만, 사실 11살의 다른 소년들에 비해 몸까지 왜소한 이 소년에게 이른 새벽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의 중노동은 결코 버텨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소년은 겨울과 봄, 여름 그리고 초가을까지 거의 네 계절을 버텨내고 있었다. 당연히 피곤했고 힘이 부쳤다. 그리고 그럴수록 떠오르는 아버지와 집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의 출현은 그런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었다.

몇 개월만에 본 아버지의 모습은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했다. 한참동안 나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는 시간이 좀 지난 뒤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내가 집을 나온 이후로 사방팔방으로 나를 찾아 헤매셨다고 했다. 가까이 지냈던 내 친구들 집은 물론이고 서울에 살고 있는 친척들 집까지 내가 가 있을만한 곳은 어디든 다 찾아다니셨던 것이다.

그러던 중 들리는 소문에 내가 이곳 덜리기 마을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이었다.

아버지와 집주인 아저씨는 담배를 피우시며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셨다. 그리고 주인 아저씨가 나에게 얘기했다.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거라." 망설일 것이 없었다. 난 고추 따던 걸 멈추고 주인집으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식모 일을 하는 누나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이것저것 챙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무척 아쉬운 듯 마루에 걸터 앉아 물끄러미 내가 하는 행동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일손이 필요할 때 떠나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은 아닌 게 분명했다.

난 짐을 다 챙긴 뒤 집 뒤뜰로 갔다. 그곳엔 내가 집을 떠나올 때 가지고 온 토끼가 있었다. 그새 새끼까지 낳아 토끼는 여러마리로 불어나 있었다. 나는 그 놈들도 같이 챙겼다. 별채에 들러 그곳에 계시는 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아버지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서려 할 때였다. 주인아저씨가 아버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광으로 들어가셨다. 광에서 나오는 주인아저씨의 손에는 반 가마니 정도 되는 쌀자루가 들려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쌀자루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딱한 우리집 사정을 고려한 것인지, 그냥 보내기가 뭣해서 준 것인지, 내가 그동안 일한 품삯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쌀자루는 아버지의 어깨에 올려졌고, 난 그 집 식구들과 인사를 하고 아버지와 대문을 나섰다. 한편으론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지난 몇 달 동안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정이 들었던 것이다.

뜨거운 땡볕 아래서 일했던 논과 고추밭, 누에 잎을 따던 뽕나무밭을 지나 황금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들판을 뒤로 한 채 아버지 뒤를 따랐다. 혼자서 떠나왔던 꼬불꼬불 좁은 산길을 이젠 아버지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는 극도로 쇠약해지신 탓인지 자꾸 걸음을 멈추고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쌀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쉬었다 가다를 반복하셨다. 그러다보니 해가 산너머로 넘어갈 즈음에야 당직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 우리 초가집이 눈에 들어왔다. 떠나올 때보다 훨씬 더 초라해진 모습이었다. 지붕의 짚을 새로 올리지 않다보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초가지붕 위로 고추잠자리들이 날아다녔고, 돌담길 주변 곳곳에는 크고 작은 호박들이 누런 색을 한 채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마당가 싸리문 입구에 있는 고엽나무도 조그만 열매들은 잔뜩 매단 채 누런 색채를 하고는 익어가고 있었다.

싸리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는 쌀자루를 둘러맨채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난 사과 괘짝에 넣어온 토끼들을 꺼냈다. 그리고 예전에 토끼들을 키웠던 뒤안의 커다란 토끼우리에 그 놈들을 전부 집어넣었다. 조그마한 사과 괘짝 안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넓은 집을 만나서인지 토끼들은 이곳저곳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난 한길로 나가 아카시아잎과 토끼풀을 뜯어 우리 안에 넣어주었다. 토끼들이 먹이를 먹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앞마당으로 나와보니 마당가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펴 저녁밥을 짓고 계시는 것이었다. 머슴살이 하면서는 절대 느낄 수 없었던 따스한 기운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한참 뒤 아버지는 반찬 몇가지까지 새로 준비하신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아버지와 난,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그저 하얀 쌀밥을 맛있게 먹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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