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세 할머니의 집-이상노 할매의 놀라운 갤러리②

 

▲ 장롱에서 이불에서 폐백 상자에서 사료 포대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이상노식’으로 재해석했다. 에헤라디야 쌍쌍파티!

 

“안에 들앙거서 꽃 피운 것은 만고에 핀허제”

“언제는 참외 생각이 나서 한번 그려봤어.”

노랗게 탐스럽게 익어 당장 따먹어야 하게 생긴 참외다. 화가 이중섭이 친구의 병문안을 가서 쭈볏쭈볏 내민 것이 그림 한 폭이었다던가.

“천도를 그린 거야. 이 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 하지 않던가. 자네도 이걸 먹고 툭툭 털고 일어나게.”

이상노 할매의 참외에는 이파리가 제대로 달려 있다. 밭에서 참외를 키워 본 이의 그림이다. “나는 놀들 안해 봤어. 논 아홉 마지기 밭 서너 마지기 농사 지스고 살았어. 할아버지가 일찍허니 아퍼갖고 일을 못헌게 내가 다 했제. 낮으로 곡석 만들어서 장에 내고 밤으로 미영베 모시베 짜서 장에 폴고. 나 놈 허는 만치 고생 했어.”

평생 흙손으로 살던 할매는 시방도 생강 심고 마늘 심고 파 모종 심고 완두콩 심고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밭이 뻔허니 보고 있는디 묵하불문 쓰간디. 밭일에다 대문 집안에 들앙거서 꽃 피운 것은 만고에 핀허제. 쪼만헌 상 딱 갖다 놓고 앙거서 그늘농사 지스는 거여.”

할매가 ‘그늘농사’ 짓는 그림밭에는 인삼이 뿌리를 내리고 대나무가 우뚝하다.

수수만번의 색칠과 가위질로 빼곡하게 채워진 할매의 그림집.

반복과 대비가 조화롭게 구성된 문짝들은 그대로 하나의 완결된 작품이다. 그 모든 그림은 벽에다 대고 그린 것이 아니다. 종이에 그린 것을 일일이 잘라서 테이프로 붙인 것이다.

“그리고 오리고 붙이고.”

그리 숱한 시간과 몸공이 쌓인 작품들이다.

“내가 가새질에 소질이 있어. 슥삭슥삭 오리는 것이 재미져. 배깥에 저런 꽃나무도 다 내가 가위질 해 갖고 키우는 거여. 나는 꽃나무에 시든 이파리 하나만 있어도 못봐. 심은 차로 내비두문 말꼬롬허들 안해.”

안 이쁜 것을 못 참는 할매. 헌 수건에조차 꽃송이를 오려 붙여 전화기 덮개를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취미를 붙인 게 헝겊에서 꽃송이를 오려내 상보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덮개며 깔개도 만들었다.

“히서 넘들 주는 재미가 있드라고. 줄 만헌 사람들은 다 줬어.”

할매가 오려낸 꽃송이가 이 집 저 집 그 어디만치서 오도마니 피어 있을 터이다.

 

▲ 마을회관 남자노인방 달력에 올린 콜라주 작품. ‘가심에다 엉벅지다 장딴지에다’ 섬세하게 꽃넝쿨을 올리고 새를 앉혔다. ‘내건시럽게’ 뵈일라고 작정한 광고를 우아하게 덮어줌으로써 마을 남자노인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마을회관 달력 콜라주에 담긴 따뜻한 유머

“하다본께 연구심이 들어가.”

궁구하는 예술가인 이상노 할매.

할매의 유머가 빛나는 콜라주 작품을 뜻밖에 마을회관에서 만났다. 남자노인들이 쓰는 웃방에 걸린 주류회사 달력.

반벌거숭이로 춥게 입은 여성 모델들은 이상노 할매의 손길로 덜 춥게 됐다.

“앞가심 다 내놓고 엉벅지 다 내놓고 쳐다보문 내건시럽잖아. 쑥씨러. 부끄롸. 글서 가심에다 엉벅지다 장딴지다 꽃넝쿨을 올리고 새를 앉혔어.”

 

 

‘내건시럽게’ 뵈일라고 작정한 광고를 우아하게 덮어준 할매의 작품활동은 마을 남자노인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남자노인 몇몇이 짐짓 웃으며 항의를 하셨단다.

“뭐덜라고 수고시럽게 붙였냐고 허드만.”

한 장에 줄여 모은 이 달력의 모델들은 또 알뜰하게 할매의 방에 모셔져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단체전을 연상시키는 꽃송이가 되었다.

할매네 가족사진 액자들도 예사롭지 않다. 가족사진 옆으로 할매가 그린 새가 날아드는가 하면 할매가 그리지 않은 개도 보초를 서고 있다. 누가 사료포대를 버렸는데 거기 개가 있어서 오려낸 것이란다.

“진돗개여. 개들이 지캐주고 있어.”

 

▲ ‘쓸모없는 아름다움’을 지어내는 몰두로 생애의 응달을 지나올 수 있었다. 그림의 꽃, 그림의 새들과 더불어 할매의 생애를 꽃대궐로 만들어준 가족이라는 존재. 사진액자에 들인 공력이 살뜰하다.

쓰잘데기 없어도 이쁜 꽃보따리

눈 뜨면 그리고 오리고 붙이기를 거듭해 온 무한열정의 작품활동으로 할매의 집엔 그림꽃이 무장무장 쌓여갔다.

“하도 많애서 겁나게 태와불었어. 나 가고 울 아그들이 없앨라문 힘들어.”

그럼에도 아직 남아 있는 보따리를 풀어보이는 할매.

세상 누구에게도 없고 오직 할매한테만 있는 꽃보따리엔 차곡차곡 꽃송이가 가득하다.

“목단꽃이 접으로 피어 있는디 돌아봄서 왔어. 꽃은 본 대로 그리고 이파리는 내 의견대로 했지. 꽃만 이쁜 것이 아녀. 이파리도 꽃만치 이삐잖애.”

 

 

‘우두거니’가 될 뻔한 자신에게 스스로 손을 내민 할매.

“쓰잘데기 하나 없지. 근디 이쁘잖애.”

쓸모없는 아름다움을 지어내는 몰두로 그이는 생애의 응달을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희망은 싸움꾼입니다. 그는 늘 절망이 있는 곳에 찾아가 그에게 시비를 겁니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말처럼, 우울한 방에 웅크리고 있던 할매는 뽈깡 일어나 희망이라는 싸움꾼을 불러들였다. 그 희망을 데불고 스스로 지은 꽃대궐의 주인이 되었다.

 

** 이상노 할머니의 고요한 일상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 주소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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