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국영화사 훑어보기 - 7회 <고래사냥>

▲ 영화 <고래사냥> 포스터

영화소개 : <고래사냥>, 1984년작, 감독 배창호, 출연 이미숙, 안성기, 김수철, 이대근 등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한국영화는 민주화과정에 서서히 편입되기 시작했다. 충무로는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을 위시하여 임권택의 <짝코>(1980), 배창호의 <고래사냥>(1984),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1988)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비판적 계열의 작품들을 선보이며 국가권력에 대한 문화적 저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작가들의 반전 노력은 내수용이라는 국지성과 함께 더 이상의 나아갈 길이 없어 보였다.” - 『한국영화의 초국가성과 정체성의 정치학 : <춘향뎐>과 <오아시스>』 중에서, 이향진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은 한국 민주화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그 뜻은 곧 경제적 근대화뿐만 아니라, 정치적 근대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제목만 보아도 그런 시대적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당시에 있어서 고래사냥이라는 것은 하나의 키워드였다.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변화를 야기하는 의미로서의 키워드. 송창식의 유행가 가사만을 읽어도 쉽게 유추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키워드를 영화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새로운 목표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주화라는 시대적 요구가 일렁이면서 영화도 그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위 논문에서 설명하듯이 시대에 부응하는 것처럼 사회비판적 계열의 작품들은 쏟아져 나왔다. 다만 작품들의 사회 비판은 고래사냥이라는 제목과 같이 은유적이고 구성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영화라는 하나의 문화예술이 전면으로 국가권력에 대항한다는 것은 분명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 비판적 의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확산시키는 가운데 내수용이라는 국지성에 가로막힌 것 역시 당시 시대의 한국영화들이 갖는 큰 문제 중에 하나였다. 당시에 정치적 혁신과 일종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의 변화도 중요했지만 한국 바깥의 국제적 여론을 환기시키는 것 역시 매우 중요했다. 그런 가운데 영화에서 제시하는 사회비판적 의제들이 국지성에 한계를 맛보는 것은 당시 영화인들이 뛰어넘어야 할 과제와 같았다.

이런 시대적 과제를 풀어내기 위하여 배창호 감독을 포함한 당시의 영화감독들이 많은 노력들을 한 것 같다. 국지성을 벗어나 다양한 사회비판적 의제들을 설정해낼 수 있도록 감독들은 영화의 힘을 키우고자 했다. 그 방법이 바로 ‘흥행’이다. 흥행하는 영화들은 그 사회적 발언권도 강해진다. 그 힘에는 조건이 있다. 단순한 주제로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내야 한다. 영화가 당시 당면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차용된 것이 할리우드 장르다. <고래사냥> 역시 할리우드 장르를 차용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한국영화 흥행 실적 1위 성적을 갈아치울 정도로 대 흥행을 하게 된다.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 이를테면 춘자와 병태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권력 구조에서의 변화를 유추하게 한다든지 민우를 통해 민주화를 열망하는 자유의 인간을 형상화한다든지 같은 인식 변화를 유도하는 것에 이 영화는 성공한 것이다. 대체 할리우드 영화의 구조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고래사냥>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했을까. 아래의 논문을 보자.

“할리우드 장르를 차용하면서 이 영화들은 냉전적 상상력에서 온 이항대립(내부와 외부, 선과 악)을 흡수해 남한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이식했다. 물론 한국 영화 산업의 성장은 이러한 대작영화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토양을 마련했지만, 이 이항대립의 논리는 한국영화에서 매우 빨리 민족-국가 차원의 딜레마와 문제에 적용되었다. 달리 말해 이 이항대립을 통해 한국영화의 ‘타자’를 발견 혹은 발명하도록 만든 것은 장르적 충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최근 한국영화의 트라우마 상태 : 테크놀로지와 원한』 중에서, 백문임

논문에서 말하듯이, 할리우드 장르의 차용으로 인해 한국영화에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이항대립의 흡수다. 이항대립의 구조를 사용하여 사회적 의제를 제시하고 설정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냉전적 상상력에서 온 이항대립은 단순해보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영화적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시대가 직면하는 사회적 문제를 큰 틀에서 내부와 외부, 선과 악의 구조로 짜 만들어 영화에 집어넣는 것이다. 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형성되었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이를 대중들에게 쉽게 주입시킴으로써 시대적 변화를 꾀해야 했던 당시의 영화적 요구에 딱 들어맞는 시스템이 할리우드 장르의 차용을 통해 유입된 것이다.

할리우드 장르를 차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고래사냥>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가장 큰 주제로서는 민주화와 그로 인한 정치적 작용이 있을 수 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영화계가 벗어나려는 노력은 수없이 탄압 받아왔다. 민주화 운동이 마침 점화된 당시, <고래사냥> 역시도 국가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시민 개개인을 추구하는 모양새다. 병태의 멘토 격으로 비렁뱅이 민우라는 인물을 그려낸 것에서 그런 메시지가 강렬하게 드러난다. 민우는 어떤 권력에도 항복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선호하고,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분명한 거리를 두려고 한다. 이처럼 자유에 미쳐있는 듯한 설정을 민우에게 준 것은 그만큼 자유를 갈구하는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할리우드 장르로서 당시의 사회적 의제를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민우라는 독특한 캐릭터는 실질적으로 <고래사냥>의 흥행의 원인이 되었다.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새로운 가치관을 등장시킴으로써 사회적 환기를 시키는 동시에 흥행이라는 영화적(혹은 문화예술적) 권력을 얻은 것이다.

 

▲ 영화 <고래사냥> 스틸컷

 

“이들이 부정하고 저항하는 것은 국가권력만이 아니다. 억압적 근대화의 기억을 담지한 역사 역시, 이들에게는 짐이고 지적 감옥일 뿐이다. 민주화는 현대 영화작가들에게 전세대가 향유하지 못한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이들에게는 민족이라는 집단적 이익과 무관한 개별성의 추구가 반드시 비사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젊은 관객과의 공감대가 있다. 이들의 영화적 상상력은 제재와 처벌, 금기로 일관하던 역사의 긴 터널을 지나며 관조와 체념을 반복해야 했던 전 세대와 다르다. 외부세계와 고립된 채 ‘한국’ 관객을 위해 ‘한국영화’를 만들던 이들에게 내재되었던 국가권력의 횡포에 그만큼 덜 주눅들었다. 또 짧은 기간에 그 정치적 파쇼가 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386세대 이후 감독의 영상언어에는 ‘상투적’인 한국성에 대한 반항이 묻어난다. 그 거칠고 일반화할 수 없는 다양한 ‘한국적’ 모습이 한국영화의 초국가적 수용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상상하는 관객은 ‘한국’에 머물지 않는다. 초국가적 상상력을 가지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이처럼 일순간 완벽한 세대교체를 이루며 과거와의 단절을 보이는 국가영화를 찾긴 쉽지 않을 것이다.” - 『한국영화의 초국가성과 정체성의 정치학 : <춘향뎐>과 <오아시스>』 중에서, 이향진

위 논문이 말하는 바처럼, <고래사냥>의 영화사적 의미는 단순히 민주화 과정에 있는 시대를 반영하고 흥행 대작영화로 성공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래사냥>은 시대를 사냥하고 있다. 낡은 시대를 사냥하고 새로운 시대를 위한 문을 열고 있다. 강조하자면, <고래사냥>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기에 386이후의 세대들이 또 새로운 문을 열고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전 근대성과 포스트식민주의에 찌들어 기형적인 ‘한국’을 설정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들어지던 영화계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만나 변화하게 된다. 경제적인 성장만이 결코 근대화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고,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을 새로운 가치관으로써 들여다볼 줄 아는 세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의 양상은 논문에서 말하는 대로, 바로 한국영화의 초국가적 수용이다. 그것엔 다양성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바탕이 되고, 그 시작점을 바로 <고래사냥>이 끊어준 것이다.

민우와 병태, 춘자의 조합을 보라. 얼마나 말도 안 되고 허무맹랑한 삶인가. 그럼에도 그들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길을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우면서도 희망찬가. 다양성과 자유로움이란 이토록 영화 전반에 걸쳐 반짝거린다. 암흑의 시대는 이제 저물어가고 저 멀리 동이 터온다.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는 세계가 영화에 담겨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고래사냥>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래는 넘실넘실 국경을 넘어 어디론가 간다. 과연 한국영화는 무엇을 사냥하는가. 흥행? 대작영화? 국지성을 벗어난 사회적 의제 설정? 할리우드 장르로서의 세계적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 이 모든 것들이 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토록 꿈꿨던 영화제작에서의 자유는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초국가적인 한국영화는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성장하게 되는 것일까. 아직 <고래사냥>의 시대에서는 이 모든 물음에 대답할 수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만큼 질문의 폭이 넓어졌고 한국영화가 대화의 장에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래사냥>은 분명 그들 자신의 사냥에 성공했다. 그 사냥의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한 세대와 시대를 풍미한 영화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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