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아버지가 준비해주신 저녁밥. 이게 정말 얼마만 인가. 비록 내가 머슴살이를 해서 받아온 쌀로 지은 것이었지만 거기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한 정이 배여 있었다. 몇가지 안되는 찬도 마찬가지였다. 머슴살이하면서 먹었던 그 어떤 성찬보다도 맛이 있었다. 아버지와 난 오랜만에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 없이 밥을 먹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때 그 순간은 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선명히 남아 있다. 몸이 온전치 못하셨던 아버지가 사랑으로 지은 밥. 더 이상 말을 해 뭘 하겠는가. 난 그 날밤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편안했고 달콤했다. 아버지도 피곤하셨던지 코를 골며 주무셨다.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눈이 떠졌다. 난 친구들이 보고 싶어 일어나자 마자 집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내 모습에 몇몇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모두들 학교에 가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잠깐의 해후뒤 방과후를 예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도 학교에 가서 5학년 수업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거의 1년 가까이를 쉬다가 갑자기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4학년을 마친 뒤 5학년 진급 자체를 포기한 상황이었다. 학교에 가봤자 수업 진도도 따라가지 못할 게 뻔했다.

하루종일 친구들을 기다리면서 난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것 보다는 돈벌이가 될 수 있는 일이나 기술을 배워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갓 50대 중반을 넘긴 연세였지만 매일을 술로 사시다 보니 밥벌이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래 내가 돈을 벌어 아버지에게 힘이 되어 드리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당장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낮에는 친구들이 학교에 가고 없어서 채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동네 꼬마들과 어울려 놀았다. 저녁 시간이 되어 친구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삼거리 마을로 텔레비전을 보러 다녔다. 당시 홍세미씨가 출연했던 `별당 아씨`라는 일일 사극과, 매주 화요일 방송했던 `전우`라는 전쟁 드라마를 아주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나와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이었다. 나와 나이차도 8살이나 됐다. 형은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내가 4살 되던 해, 형도 나처럼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집을 나갔다고 했다.

난 형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어렸을 때 집을 나간 이후 형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가지 기억 나는 일이 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아버지는 들에서 밭일을 하고 계셨다. 나는 하얀나비, 노랑나비들을 쫓아다니며 아버지 주변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형이 나타났다.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같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은 머리에 대나무 광주리를 이고 들로 나왔다. 광주리 안에는 보리밥과 반찬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이제 갓 4살의 어린 난 아주 맛있게 밥을 먹었다. 이것이 형에 대한 내 유일한 기억이었다.

아버지는 처음 형의 어머니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그래서 형을 낳았다. 하지만 형의 어머니도 아버지의 연이은 술주정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고 말았다. 이후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와 재혼을 하셨다. 그리고 나와 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형은 그 당시 집안의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결국 집을 나갔고 서울까지 올라가 공장에 취직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추석 때가 가까워오자 아버지와 나를 보기 위해 집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나, 3부자가 추석 명절을 함께 보낸 것도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추석 명절이 끝난 뒤 형은 집에서의 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졌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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