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국영화사 훑어보기 - 8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포스터

영화소개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년작, 감독 배용균, 출연 이판용, 신원섭, 황해진, 고수명 등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자연스레 불교철학과 인도철학을 접하게 된다. 철학과 내에서도 특히 인도철학은 불교에 상당한 의존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원시적인 사상에 있어서 놀랍게 다가온다. 쉽게 말하자면, 인도 내에서의 원시 불교는 날 것과 같고 중국불교나 여타 철학과는 다르게 사회나 민족보다는 더 근원적인 인간을 탐구하려고 한다. 모든 불교가 실은 이러한 원시 불교에서 시작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민족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 마냥 오히려 인도에서 파생한 강력한 탈민족성, 탈국가성, 탈사회성, 탈근원성에 다른 불교와 철학들은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것은 나 스스로를 외톨이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와 별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런 원시 불교적 자세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영화는 심오한 것을 넘어서서 외톨이에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드는 듯하다.

“흔히 서구사회가 세기를 넘기는 장기간을 거치며 주체적으로 겪었던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을 한국사회는 30여년의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수행했다. 그같은 압축 근대화의 과정도 주도권이 없이 근대로 들어서 강압적인 사회구조적 변동을 경험하고 식민통치와 민족분단, 동족 간의 전쟁을 경험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억압성을 띠었다. 이러한 정치적 변동과 혼란이 과거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현대 한국영화는 더 이상 과거의 정체된 시간 속으로 돌아갈 수 없다. 외양적 발전만큼 불거지는 위기의식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영화가 추구하는 적극적 자기부정은 다양한 측면에서 새로운 ‘한국성’의 재현 노력으로 나타나고 이를 이끄는 것은 역동적인 정체성의 정치학인 것이다.” - 『한국영화의 초국가성과 정체성의 정치학 : <춘향뎐>과 <오아시스>』 중에서, 이향진

위의 인용은 전형적인 한국영화사의 맥락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한국영화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영화사가 포스트식민기와 마구잡이로 유입되는 근대화, 전쟁 등을 겪었으므로 한국영화 역시도 그런 역사적 사건들에 대응해서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사건들을 다루며 그 사건들 사이에서 영화가 갖는, 또는 영화 속의 사건과 인물들이 갖는 사회적 역할이나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다루는 것이야말로 한국영화의 숙명처럼 보여 왔다. 논문에서도 말하는 바와 같이 늘 새로운 ‘한국성’을 규정하려고 한국영화들은 끊임없이 진화했다. 그것은 적극적 자기부정이라는 형태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자기부정이라고 해도 그것이 허무성이나 탈사회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한국사회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영화는 한국사회의 영화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장르나 플롯의 전개나 등장하는 캐릭터까지도 모두 한국사회를 철저히 반영하고 있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이런 한국영화의 장르성을 모조리 분쇄하고 있다. 애초에 배용균 감독은 한국영화라는 꼬리표를 달고 이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사찰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중이라는 인물의 특성들은 철저히 ‘한국성’에 입각할 수도 있는 요소들임에도 불구하고, 배용균 감독이 설정한 모든 공간과 인물, 심지어 시간까지도 정확히 무엇이며 어떠하고 언제인지 부연을 달 수 없을 정도로 괴기스럽게 다가온다. 모든 게 의도적으로 불명확한 배경 위에서 벌어지는 것이라곤 세 명의 승려가 겪는 일들뿐이다. ‘한국성’이 갖는 모든 서사성을 포기하고 오직 세 명의 승려에만 카메라가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다. 영화는 사회에 소속되어야 할 만큼 복잡한 것이 아니다. 영화는 단순할 수 있고, 영화를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역사성, 사회성에서 벗어난 오직 개인이다. 불교라는 종교적 배경을 깔아놓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오직 개인만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종교적 도구로서 불교만한 것이 없다고 싶었을 테다. 모든 철학을 통틀어 사회와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얼마 없다. 원시 불교의 사상은 영화의 테제를 형성하는 것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인물의 설정에서부터 노인, 청년, 아이를 두었다는 것은 불교적 인간에서의 시간성을 표현하겠다는 의지로 비친다. 그래서 그 인물들을 통 틀어 오직 하나의 인간만이 남는, 사회와 역사의 초월성으로 전개되는 영화의 내용은 평범한 관객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 미묘하다.

 

▲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스틸컷

 

“세계 예술사에 있어서 가장 오래되고 흔한 모티브는 젊은이들의 연애일 것이다. 연애담은, 그것도 처절하고 극적인 연애담은 남녀노소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소재임에 틀림없다. 연애는 영원히 늙지 않으려는 욕망, 또는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일상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욕망의 결핍을 충족시켜 준다. 이에 비하면 작품의 수와 관심도에 있어서 상대적인 약세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가족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예술작품의 경우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이 ‘열정, 일탈, 초월, 젊음’ 등을 낭만적인 사적 정조로 취급하는 경향이 짙다면, ‘가족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공적이고 사회적이다. ‘가족’은 예술가에게 있어 상상력의 원천으로, 추방당한 자의 유토피아로, 또는 사회와 국가의 환유로 작용해 왔다.” - 『한국영화와 가족 담론 : 1960년대와 2000년대를 중심으로』 중에서, 박명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서는 위 인용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일종의 프레임들을 모조리 격파한다. 젊은이들의 연애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 사치다. 청년 승려는 가난에 쫓겨 절에 들어왔다. 그에게 무슨 연애라는 것이 있으며,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일탈과 열정, 젊음을 제공하겠는가. 게다가 아이 승려는 아직 연애라는 것도 모르고 속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노인 승려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죽음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 모든 속세의 물질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일상 세계의 말로 하자면 논문에서와 같이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게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속세의 편견이다. 죽음을 앞둔 노인이 모든 것에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 캐릭터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담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 오히려 짐이 될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청년 승려에게 있어 가족은 수행 중의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짐, 업보(karma)다. 가족이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추방당한 자의 유토피아가 되는 것은 사회가 주는 일종의 환각에 불과하다. 사실상 가족 역시도 사회의 하나이고,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 전반에서 추구하는 일종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려들은 ‘사바세계’라는 말로 속세를 경계한다. 노승은 청년 승려에게 그 사바세계의 끈을 모두 끊으라고 가르친다. 노승은 소멸이며 아이 승려는 시작이다. 시작과 소멸 사이에 청년 승려는 놓여있다. 그리고 그가 사바세계를 다시 택할 것인지,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수행을 완성시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 인물이 살아가는 배경은 사회적이고 공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그것이 옳고 그른지는 아무도 판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뿐이다. 노승은 죽음을 택해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였고, 아이 승려는 새를 죽임으로써 사바와 선(禪) 사이의 경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청년 승려는 끊임없이 갈등한다. 시작과 소멸 사이에서 가장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는 삶이 바로 그의 삶이다. 불교적 인간이 시기마다 어떤 번뇌와 고민을 겪게 되는지 이 영화는 너무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 과정 속에서 영화가 탈사회적, 탈국가적, 탈근원적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모든 인물과 사건에 근원을 따지지 않아야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가 번성하지 않고, 오직 개인만이 남는다. 오직 노승과 오직 청년 승려와 오직 아이 승려만이 오롯이 남는다. 이 과정이 비로소 불교적 배경을 타파하고 오직 인간만이 남게 만드는 것이다. 청년 승려가 아이 승려를 떠나는 것 역시 오로지 자아로서의 인간만이 남았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삶의 갈림길이다.

달마가 왜 동쪽으로 갔을까. 중국 불교에서는 달마가 왜 서쪽에서 왔는가, 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달마의 시선에서 묻는다. 달마라는 인간에 집중하고 달마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경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는 철저히 철학적인, 그것이 불교 철학에서 시작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국한할 수는 없다, 자아 탐구에 집중하여 매몰되어 있다. 한국영화사의 흐름 속에서는 이단아라고 평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간 사회와 국가 또는 영화 속에서 말하듯 사바세계에서 살아가느라 바쁘고 지친 한국영화와는 너무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전부는 아니라고, 중요한 것은 또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고. 이 영화는 은연중에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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