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여정, 강물은 말이 없다
기나긴 여정, 강물은 말이 없다
  • 김초록 기자
  • 승인 2018.06.22 13: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초록 에세이> 두물머리에서

 

우리의 땅은 어딜 가나 강이 없는 곳이 없다. 강은 대개가 산과 들을 품고 있다. 깊은 산에서 첫걸음을 뗀 물길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과정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싱그러운 여름날을 만끽하기에 강만큼 좋은 곳도 드물다. 해서 설렘과 기대를 안고 달려온 두물머리.

햇살 곱게 내려앉은 강가에 앉으니 녹색의 향연이 가득하다. 강을 건너온 습기 묻은 바람이 옷자락을 펄럭이게 한다. 여기저기 막 피어난 앙증맞은 들꽃들이 인사를 건넨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지나 여름을 보내고 있는 땅 위의 생명들이 대견해 뵌다. 강가로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밝은 표정에서 생기를 얻는다.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 금대봉 기슭에서 발원하는 남한강이 비로소 하나의 큰 물길을 만드니 한강이다. 두물머리(二水頭) 혹은 양수리(兩水里)는 여기서 비롯된 지명이다. 남과 북에서 흘러온 두 개의 물줄기가 이곳 양수리에서 몸을 섞는다.

모든 물길은 마침내 합쳐져 바다에 이른다. 물은 수천, 수만, 수억 년 전부터 제 갈 길을 훤히 알고 있다. 여울이 되었다가 개울이 되었다가 폭포가 되었다가 강이 되었다가 종내는 바다가 된다는 것을. 바다가 되어 하얀 물머리를 일으키며 뭍으로 밀려간다는 것을.

두물머리에서 합류된 강물은 곡선 물길을 달려 인천 앞바다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유원지로 바뀐 두물머리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강원도 정선과 충북 단양, 서울 뚝섬과 마포를 연결하던 나루터였다. 그러다가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고 이 일대가 그린벨트로 묶이면서 나루터로서의 일생을 마쳤다.

 

 

용이 살았다는 태백 금대봉의 검룡소에 갔던 때가 재작년 늦여름이었던가. 한강이 이 작은 못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모처럼 짬을 내어 달려간 길이었다. 검룡소로 들어가는 길은 싱그러웠다. 진녹색으로 우거진 산숲길이 청신하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검룡소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내 심장이 가쁘게 맥박치고 있었다. 실핏줄이 곤두서고 있음을 느꼈다.

아, 한강 발원지! 이곳이 대체 어떤 곳인가. 한강의 시원을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다. 지극히 순수한 하늘이 내린 물. 마침 갈증이 몰려와 바위틈에서 꽐꽐 솟아오르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을 타고 내리는 시원함에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느낌이었다. 숲을 빠져나온 한 줄기 바람이 등허리의 땀을 식혀주었다. 두물머리에서 검룡소의 기억이 떠오르는 건 그 때의 느낌이 각별했기 때문인가.

검룡소에서 시작된 가느다란 물줄기는 삼척땅을 살풋 적신 다음 정선 영월 단양 제천 충주 원주 여주를 거쳐 이곳 양평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반갑게 만난 뒤 광주 하남 남양주 구리를 지나 서울의 노량진과 마포나루에 잠시 들렀다가 김포시 월곶 보구곶리에서 임진강을 받아들인 뒤 서해로 빠져나간다. 그 기나긴 여정에도 강물은 불평 한 마디 없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는 두물머리 벤치에 앉으니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이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햇살이 강물에 멱 감는 모습을 본다. 문득 저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은 무슨 심사인가. 물속에 하늘이 비치고 숲이 비치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뭉게구름이 보인다. 수령 400년을 헤아리는 느티나무는 언제나 그랬듯이 강을 바라보고 있다. 말이 쉬워 400년이지 느티나무는 파란 많은 한강의 역사 나아가 한민족의 역사를 온몸으로 지켜봐왔을 것이다. 촘촘히 박힌 나이테 속에 그 역사가 들어 있을 것이다.

느티나무가 없는 두물머리는 밋밋한 하나의 강변에 지나지 않지만 나무가 서 있음으로 해서 풍치가 한결 살아나고 있다. 두물머리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아름다운 강변에 집을 짓고 글을 썼을 학자의 풍모가 어렴풋이 그려진다.

두물머리에서 조화의 미를 다시금 본다.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연인들 사이로 후덥지근한 바람 한 줄기가 휙 지나간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영물이었던가 보다. 해마다 고목 아래서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예부터 이 나무 옆을 지날 때는 누구든지 옷을 벗고 말을 탄 사람이면 말에서 뛰어내렸다니 그 사연이 예사롭지 않다.

잔잔한 강물 위에 뱃사공 없는 나룻배(목선) 한 척이 동동 떠 있다. 그 모습이 참으로 고요하고 평화롭다. 나룻배도 생명체라면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강물을 먹고 자란 갈대들이 바람 한 줄기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세 번 정도 다녀간 곳이지만 철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먼 길을 달려온 기쁨이 크다. 젊은이들에게 두물머리는 낭만과 서정이 풍기는 데이트 장소이겠지만 나이 지긋한 중 장년 세대들에게는 삶을 돌아보는 호젓한 공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웃고 울고 추억을 남겼을까.

두물머리 한쪽으로 기다랗게 오솔길이 나 있다. 들과 강을 옆에 둔 오붓한 흙길을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길을 걷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과 산의 표정이 맑고도 다정다감하다. 진초록으로 단장한 산과 뭉게구름을 몰고 다니는 하늘에게 눈인사를 건넨다. 즉시 돌아오는 대답. 반가워요, 오랜만이에요.

강은 신성한 공간이다. 철따라 색감을 달리하는 산들과는 달리 강은 언제나 한 색깔이다. 간혹 오염이 돼 검은색을 띨 때도 있지만 그 검은색도 결국 자정을 통해 제 색깔로 돌아가곤 한다. 강이 검은 색을 띤다는 건 죽음이다. 우리는 그동안 죽음의 강(하천, 개울)을 숱하게 보아왔다. 그 이지러진 모습을 지켜보면서 맑고 깨끗한 자연이 왜 소중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물을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선으로 여긴 노자의 사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메시지를 던져준다.

강은 깊은 산 속의 바위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모여 이루어졌다. 바위틈의 작은 샘이 강이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은, 어느 날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수십 년의 세월을 살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일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강은 생명의 원천이자 삶의 근원이다. 사람살이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지켜본 산 증인이다.

강은 이 세상의 어머니요 젖줄이요 혈관이다. 한 모금의 물은 몸속의 피를 돌게 하고 에너지를 생성시킨다. 이 나라는 강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강이 있는 곳에 마을이 들어섰고 도시가 생겨났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도로가 뚫렸다.

사람은 강에 기대어 살아간다. 한평생 살다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곳도 흙이 아니면 강이다. 한 줌의 재로 강에 뿌려져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태어나고 돌아가는 순환의 원점. 강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생명의 그릇’ ‘에너지 저장소’임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강이 건강하면 사람살이도 건강하게 마련이다. 강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강에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책무다. 온갖 나무와 꽃들, 새들과 짐승들이 강과 더불어 살아간다. 정과 그리움이 흐르는 강 앞에서 그저 겸허히 옷깃 여밀 뿐이다.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강물은 오늘도 그 길을 천파만파(千波萬派)로 흘러가고 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 뉴텍미디어 그룹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 07108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 인터넷 : 서울, 아 52650 (등록일·발행일 : 2019-10-14)
  • 발행인 겸 편집인 : 김영필
  • 편집국장 : 선초롱
  • 발행소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목로 72(신정동)
  •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전무이사 : 황석용
  • 고문변호사 : 윤서용(법무법인 이안 대표변호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 위클리서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weeklyseoul.net
저작권안심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