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니쿤카, 무지개산…산은 냉정했다
비니쿤카, 무지개산…산은 냉정했다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8.06.2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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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열한 번째 이야기 / 강진수

21.

트래킹이 시작된 지 30분쯤, 사람들은 아직까지는 버틸만하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나와 형, 그리고 에이미는 개울이 흐르는 작은 언덕에 잠깐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형이 조금 산행을 버거워하는 눈치였다. 형의 숨이 점점 가빠졌고 다리도 후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형의 원래 체력이나 또 산을 좋아하는 형의 본래 모습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산행 30분 만에 힘들어서 주저앉고 마는 형이 조금 어색했다. 그러나 쿠스코에서부터 고산병 증세가 조금 있었던 형이기에 그런 모습이 잘 이해됐다. 고산병 증세가 있으면 결코 무리해서는 안 된다. 에이미에게 양해를 구하고 형의 발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걷기로 하였다. 에이미도 흔쾌히 이해해주면서 걱정 말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혈혈단신으로 트래킹을 온 우리와는 다르게, 에이미는 가방에 물과 간식을 잔뜩 챙겨왔다. 우리는 잠깐씩 쉴 때마다 에이미의 식량을 조금씩 나누어먹으면서 에너지를 보충해야만 했다.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안데스 산맥의 산들은 평화로웠다. 높은 고산이라 그런지 큰 나무는 없고 자잘한 풀만 넓게 자라 있었다. 산의 경사는 꽤 가팔랐고 마추픽추 때보다 트래킹이 상당히 버거웠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풍경들은 나를 평화롭게 가라앉혀 주었다. 곳곳에 잉카 식으로 지어놓은 오두막이 보였는데 얼핏 보면 돌무더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곳에 앉아서 우리는 물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형에게는 힘들면 걱정 말고 말을 타라고 했다. 트래킹 하는 사람들 사이로 말몰이꾼들이 말을 데리고 호객을 하고 있었다. 산이 험해서 중간에 트래킹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말을 타는 비용이 50솔로 꽤 비쌌다는 것인데, 형은 넉넉하지도 않은 여행길에 자신이 이 돈을 쓰기가 싫었나보다. 매우 고집스럽게 자신도 걸어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하며 우직한 발을 떼곤 했다. 그러면 에이미와 나 역시 형 걱정을 하며 그 뒤에서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었다.

 

 

전체 산행의 중반까지 왔을까. 들판의 반대편 너머로부터 라마 무리들이 뛰어서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에이미와 나는 신이 나서 라마에게로 다가갔다. 물론 우리가 다가가면 라마들이 피해버려서 만지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가까이서 라마들을 구경할 수는 있었다. 산세에 몸은 녹초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이토록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 앞에서 나는 두근거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에이미도 그런 것 같았고 우리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두근거림을 나누었다. 풍경에 대한 이야기, 마추픽추를 본 기억과 즐겨듣는 음악, 앞으로의 여행 일정 등을 대화했다. 알고 보니 에이미도 비니쿤카 트래킹을 끝마치고 곧 볼리비아로 넘어간다는 것이 아닌가. 우유니로 그녀도 바로 갈 것이라기에 그녀의 계획이 우리와 참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에이미에게 우유니에서 연락을 해서 다시 만나 같이 여행을 다니자고 제안했다. 에이미는 너무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여행을 다니는 도중에 마음에 맞는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일까. 이런 우리의 생각과 바람이 과연 이루어질까라는 의문이 나중에 어떻게 돌아올지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중반을 넘어서고 부터는 산세가 급격히 가팔라졌다. 중도 포기자가 속속 나타났고 말들은 바삐 움직였다. 형도 증세가 점점 악화되어서 가슴에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말은 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오히려 가파른 경사에 함께 에너지가 치솟기 시작했다. 기분도 상쾌하고 좋아진 것이다. 에이미도 슬슬 버거워하기 시작하자 나는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무슨 노래를 부르면 좋을까 에이미에게 물어보자 에이미가 밴드 ‘오아시스’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휴대폰에 들어있는 오아시스 노래를 전부 틀어 마구잡이로 부르기 시작했다. 'Wonderwall'부터 시작해서 ‘Champagne supernova'까지. 손으로 허공에 가짜 기타를 치면서 신나게 춤도 추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같이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 나와 에이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쳤던 눈에는 점차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사람들이군, 혹은 이상한 녀석들이군, 뭐 대충 이렇게 생각들 하는 눈치였다.

 

 

덴마크에서 왔다는 사람, 일본과 코스타리카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잠시 쉰다고 앉아 있다가 나와 에이미가 신나게 부르는 노래를 보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디서 왔는지, 얼마 여행을 하는지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자신들도 오아시스 노래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참 산을 오르는 길바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콘서트를 했다. 노랫소리는 더 커졌고 우리는 그 노래에 이미 심취해 있었다. 고산병에 지친 형은 노래를 부르기는커녕 꽥꽥거리는 나의 괴상한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하지만 노래 부르는 게 무슨 대수인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나의 록 페스티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안데스 산맥 한 가운데에서 즐기는 록 페스티벌이라니. 이만큼 낭만적인 것이 어디 있단 말일까. 헉헉거리며 산을 오르시던 머리가 하얀 한 할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 한 말씀 하셨다. “젊은 게 참 좋은 것이구나.” 그렇다. 우리는 젊어서 아직 노래할 수 있었고, 힘들어도 걸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들은 얼마나 나를 설레게 하는가. 저 꼭대기 위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비니쿤카, 무지개산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미지의 세계를 앞두고 우리의 젊음은 폭발하고 있었다.

 

22.

형이 가슴을 꼭 움켜쥐고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고산병 증세가 심해진 것이다. 단순히 어지럽거나 숨이 헐떡거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 통증을 심하게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상당히 높은 곳에 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절대로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몸의 충고이고도 했다. 형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내가 설득해 형은 결국 혼자 말을 타기로 했다. 50솔이라지만 몸이 아프다면 그것을 절대로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렇게 말을 탈 것이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타는 것이 옳긴 했겠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말을 중간에 타든 처음부터 타든 50솔인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걸어온 만큼 눈에 들어온 풍경들이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형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너무 힘들고 어지러워서 풍경은 하나도 눈에 안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러고 보니 고산병 증세가 심한 사람들은 무리하지 않고 바로 말을 타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가이드가 주저앉은 형에게로 다가와 코카 잎을 건네주었다. 고산병에는 코카 잎을 입 속에 넣고 씹으면 조금 나아진다고 한다. 형은 무슨 라마가 된 것 마냥 코카 잎을 잔뜩 입 안에 욱여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까발료! 까발료!” Caballo, 스페인어로는 말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힘차게 휘파람을 불며 말몰이꾼을 불렀다. 워낙 산세가 험한 지역이라 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있어 말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가이드가 열심히 말을 불렀지만 말몰이꾼들은 고개만 저으며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할 뿐이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기다려도 말이 오질 않자 가이드가 나와 에이미에게 먼저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말이 오면 금방 따라잡힐 테니까 먼저 많이 걸어두라는 것이었다.

많이 아파하는 형을 두고 가려니 발걸음이 조금 무거웠다. 에이미는 내 손을 끌며 얼른 먼저 가주는 것이 형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줬다. 나는 걷고 있으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 형의 위치를 파악했다. 아직도 말을 타지 못했나. 아직 많이 아픈가. 남미라는 낯선 대륙에 여행을 와서 단 한 번도 서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는데, 아픈 사람을 이렇게 두고 떠나야 한다니. 그러나 비니쿤카에 오르려면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산은 냉정하고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 가르침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산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줄 테니까. 그러니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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