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세 할머니의 집-심계순 할머니의 두 칸 집③

▲ 여전히 쓰고 있다. 심계순 할매가 ‘서망’이라고 부르는 변독.

개 한 마리하고 바꾼 스레트 지붕

할매의 방엔 앉은뱅이책상 하나, 작은 문갑 하나가 살림의 전부다. 그 나머지는 보자기나 봉다리로 보따리보따리 봉다리봉다리 야물게 단속해 두었다.

“내가 그리 추접은 안 내고 사요마는.”

겸양의 말씀이다. 요새 사람들이 말하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이란 이런 것. ‘궁극의 미니멀리즘’이 실현된 할매의 집이다. 마루 아래는 껌정 고무신 한 켤레. 그 흔한 플라스틱 쪼가리 하나 찾기 어렵다.

그나마 신식 물건이라고는 오래된 냉장고 하나.

“나는 테레비도 안봐. 전에 있었는디 어긋나서 내뿔었어. 테레비 밸 필요 안허요. 내가 구식 사람이라.”

 

▲ ‘서망’ 앞 비료 푸대에 손바닥만한 크기로 자른 신문지가 차곡차곡 담겨 있다. “내가 머이라고 존 종우를 써.”

 

할매의 집에서는 신문물에 속하는, 고색창연 슬레이트 지붕은 개 한 마리하고 바꾼 것이다.

“스레뜨는 아들이 사놓고 갔어. 친정 동상들이 목수쟁이 데꼬 와서 일을 해 준다고 헌디 삯 줄 돈이 없어. ‘헐 수 없다. 개라도 묵게 해줘야쓰겄다’ 맘을 묵었는디, 그 놈을 잡을 수가 없어. 계란을 삶아갖고 정게서 먹는 시늉을 헌께 들와라. 쥔네라고 들온 것을 내가 옆에 갖다 둔 작대기로 탁 투들어서 잡았소. 그 놈을 차두에 담아서 갖다줘야 스레뜨 해도란 말을 허겄어. 뻐스를 타고 갈라고 헌게 차장이 ‘피가 흘러서 못씨겄소’ 그러는 것을 ‘헐 수 있소. 내가 스레뜨를 헐라고 이만저만 허요 쪼깨 양보허씨요’ 긍께 암말도 안헙디다. 그때 내가 개 투드는 디 보고 동네 이핀네가 ‘나는 인데까(여즉) 복산떡이 안 싸난 줄 알았네’ 허더니, 그 뒤로는 나를 무솨라 그래라.”

내 걸음발 앞에서 총 맞아 죽은 남편을 땅을 파서 묻고 건너온 세월은 강하지 않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는 날들이었다.

“나는 이 시상에 무선 것이 없어라.”

 

▲ 용도를 상실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돼지막. “돼야지 키와갖고 포도시 살았소.” 그 고마운 것을 못 잊어서 거기 두고 노상 눈대면서 산다.

 

복산떡이 개 한 마리하고 바꾼 스레뜨 지붕이 보듬아서 지키는 본채 가차이엔 용도를 상실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돼지막이 있다. 지붕도 벽도 다 무너진 돼지막에는 돼지가 밥 먹던 구시가 그대로 있다.

“돼야지를 일년이문 두 마리썩 냈어. 그놈 돼야지 키와갖고 포도시 살았소. 돼야지 아니었으문 못 살았어라.”

그 고마운 것을 못 잊어서 거기 두고 노상 눈을 대면서 산다.

“시어마니가 들에 갔다 올 직에는 항시 고맹이(고마리) 풀이라도 손에다 찌고 오새. 돼야지 준다고. 손지 잘되게끔 헐라고 고상허샜어. 뭐이든 벌문 내게다가 딱 줘뿔어. 뭐슬 모른 것마니로. 내게다 권(권리)을 줘불라고 그랬제. 댐배도 사다드래야 잡수고 글케 허십디다 내게. 시어마니 생각에도 못 뜯고 보요.”

못 뜯고 보는 돼지막 몇 걸음 옆으로는 안 뜯고 시방도 쓰는 헛간 겸 치깐(측간, 변소)이 있다.

“우리집은 수도만 묻었제 치깐은 구식대로여. ‘서망’(심계순 할매는 그리 부른다. 소매 항아리. 큰 항아리를 묻어 쓰는 변독) 쓰는 사람은 나 한자이지매. 두 개여라. 내가도 푸고 아들이 오문 퍼주고. 나 한자 본디 거름 맹글 것이나 있가니. 호박고지에나 째까 찌클제.”

‘생태변소’라는 말을 아지 못하는 할매의 ‘서망’ 앞에는 비료 푸대에 손바닥만한 크기로 자른 신문지가 차곡차곡 담겨 있다.

“내가 가새로 깔랐어. 내가 뭐이라고 존 종우를 써. 나는 순전히 구식사람이여. 암거나 쓰문 어쩌가디. 미느리가 화장지 사다 놨어. 지그들 돈 주고 산 것을 아까운께 안 써. 내가 뭐이라고. 며느리 아들 손자 오문 쓰라 그래야제.”

 

▲ “호무 차고 낫 차고 쪼끄리고 앙거서 밥묵는다”는 말을 듣던 복산떡. 한번 내 것이 된 인연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끝의 끝까지 지키는 할매의 손.

“나 꼿꼿해. 나 곡괭이여라”

마당에 감나무 한 그루도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는 할매의 집.

“이 아래가 밤나무자리였어라. 소개됨서 그것도 타불었소. 우리 아버니가 집 지슴서 그 자리다 심었어. 저짝에치는 괴얌(고욤)감나무여.”

콩도 치고 폿도 치고 할매가 성성할 적 저도 활기차던 마당은 무장무장 고요가 쌓여가고 그 가상으로는 봄이라고 꽃잔디 분홍빛이 환하다.

“혼차 산 사람이 뭔 꽃을 얼매나 질거워라고 헌다요. 우리 매느리가 참 좋아라. 친정에서 갖다 숨거 놉디다.”

꽃보다 꽃 심은 며느리의 마음을 앞세우는 할매.

“울 아들이 스물 넷에 장개 갔어. 여울라고 요 아래채 지섰어. 여그 옆에 돌아가신 양반이 지섰어. 윤병옥씨. 작년 정월에 돌아가셨어.”

아들 며느리는 삼년 함께 살고 남매를 낳아서 서울로 이사를 갔다.

“나 젊어서 동네서 말도 잘 안 섞고 본 적 만 적 하고 싸납게 허고 산께, 복산떡은 며느리 못볼 거라고 그런 말도 나옵디다. 그러껜가 우리 미느리가 내한테 그래. ‘나 시집와서 암것도 할질 몰랐는디 어머니가 잘 봐줘갰은께 나도 잘헐라’ 그러드만. 나 미느리 잘 봐. 시어마니가 내헌테 허시는 것을 저껐는디.”

처마 아래 쌓아둔 나무더미만 봐도 시어머니 생각이 난다.

“시어마니 살아서 해다 논 놈 끌텅이 안즉 있어라, 다 못때고. 인자 못허겄어. 작년 봄까장도 밭 가상에 자빠진 갈쿠나무 큰 놈도 주서갖고 왔는디 어지께는 못 갖고 오겄습디다.”

 

▲ “나 꼿꼿해. 나 곡괭이여라.” 맘 속에 곡괭이 하나 세우고 냉혹하고 무자비한 생애를 건너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

 

할매한테 늙음이란 땔나무를 눈으로 보고도 못 가져오는 것이다.

“땔나무 있을 동안 그 안에 죽어야껀디. 미느리가 밤낮 암데도 가시지 말고 꽉 있으라고 낙상허문 큰일난다고 전화를 해. 나 죽을라그문 기계(산소호흡기) 꼽지 말고 죽으라고 냅둬라 유언했어.”

‘구식사람’ 심계순은 모상근과 혼인하던 열여섯 살 그 날 올린 낭자머리로 아흔 살 된 이날까지 평생을 살았다. 숱이 빠져 성긴 머리에 걸친 비녀는 끝이 반들반들 닳았다.

“장에서 샀어. 및 십 년 되았어. 인자는 장에 비녀 없어. 나는 빠마 한번도 안해 봤어. 하고자운 적이 없어. 고흔 옷도 욕심 없어. 나는 암것 생각이 없어. 아들만 집중허고 살았제. 그런께 넘의 새끼들도 뻘로 안 보요. 이녁 새끼를 생각허문 모다 안씨롭고 거석허제.”

머릿속에 가득 담은 것은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아들 하나였다.

“조깨라도 높은 디 올라서문 시방도 만날 축수허요. ‘하느님네 천신만신 믿은 과수떡인께 아들미느리손지 잘 살게 해주씨요. 나 간 뒤라도 복산떡 고상허고 살더니 아들손지 좋게 산다고 그 말 듣게 해주씨요’ 그러고 축수해.”

자신에게도 자신이 사는 집에도 더 이상 보탤 것 없노라는 할매.

“그러께인가 눈이 와서 저짝이 어그라져서 고찼어. 아들이 새로 지슬라근디 못 짓게 했어. 내한테는 요 집이 딱 맞어. 사람이 쫄아든께 토방이 높아뵈여도 댕애버릇해서 괜찮애. 요 집도 나맨치나 오래 잘 버퉜소.”

풍상 속에도 잘 버텨온 집처럼 시방도 씩씩한 할매.

“혼자 살아나온 곤조가 있어. 구식 망구가 꼿꼿해. 나 곡괭이여라. 이녁 숭 몰라서는 못써.”

맘속에 세운 꼿꼿한 곡괭이가 냉혹하고 무자비한 외력에 맞서서 생애를 버텨나온 심계순의 내력(內力)이었을 터.

**심계순 할머니의 고요한 일상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 주소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