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세 할머니의 집-해남 박길님 할매 집①

간판도 없고 이름도 없다. ‘점방’이란 보통명사가 이 마을에선 그곳을 가리키는 고유명사. 마을에 유일한 점방이다.

‘날 좀 보소’라는 호객은커녕 집 속에 가만히 숨어 있는 점방. 점방에 가려면 일단 대문을 들어선다. 지금 막 상추 쑥쑥 올라오는 텃밭이 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토방에 닿는다. 수문장처럼 버티고 선 호랑이를 불시에 맞닥뜨린다. CCTV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 금방이라도 포효할 듯한 호랑이 한 마리 모셔 놓은 액자 아래 방문이 바로 점방문. 쇠때가 채워져 있다면 주인은 아마 뽀짝 가까운 마을회관에 마실 가셨을 게다. 문이 열려 있다면, 주인은 안방에 계실 것이다. 안방에서 이 점방으로 향한 방문 아래쯤에 ‘사람 뵈라고’ 유리가 자그맣게 대져 있어 누가 오가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 한옥 살림집의 방 한 칸에 들어선 점방이라니! 낭자머리를 한 박길님 할매가 그곳을 지키고 있다.

 

한옥 살림집의 방 한 칸에 들어선 점방이라니!

물건을 사려면 토방에 신 벗고 마루에 올라서 방 문턱을 넘어 들어서야 하는 점방이다.

주인장은 이 마을 구성리(해남 산이면)에서 가장 나이많은 박길님(95) 할매. 낭자머리를 한 할매가 지키고 있는 점방이다. 비현실적인 설정 같은 장면들이 이곳에선 암시랑토 않게 실재한다. 천연스런 일상이다.

 

▲ 변화의 물살에 떠밀려가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단칸 점방. 이러저러 살림살이 수납하듯, 안방 옆 대청에 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안방 옆이 점방, 50년 동안 문 열어와

궁즉통(窮則通)이랄까, 대범한 발상이랄까. 안방 옆 대청을 점방으로 삼아 물건들을 진열해 놓았다.

듬성듬성 밀도 낮은 배치가 이곳에 드나드는 손님들의 수와 매상을 짐작케 한다. 흐르는 세월 동안 마을 사람들도 줄어들고, 슈퍼며 마트며 편의점이며 새로운 이름을 지닌 유통공간들이 생겨났지만, 변화의 물살에 떠밀려가지 않고 고요하고도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단칸 점방. 기적적 생존이다.

“영감이 시작한 때부터 시어 보문 한 오십 년 되얏어.”

반세기의 역사를 지녔다. 한때는 ‘만물상회’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이되, 지금은 슈퍼타이 식용유 간장 화장지 홈키파 식초 소다 미원 술 담배 새우깡 등등 그저 한 집의 저장고라 해도 될 만큼 단촐한 품새다.

“옛날에는 팽야 가정에서 쓰는 거는 다 있었제. 인자는 차가 가정에 있응께 다 나가서 사날르제. 때때로 댐배나 사러오까, 손님 벨로 없어.”

하루하루 매출은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으짜문 나가.”

사탕 사먹으러 과자 사먹으러 아이들도 들랑날랑 수런수런하던 활기는 동네에 아이들도 많았던 세월 저편의 일. 그래도 여전히 동네 사람들에겐 ‘없으문 솔찬히 아수울’ 점방이다. 이웃에 살며 오명가명 들여다보는 김은호(57)․양인선(54) 부부 역시 이곳의 고객.

“식용유든 화장지든 해필 똑 떨어졌을 때 ‘엄니∼’ 부름서 신속히 갖다 쓰는 곳”이다.

이 점방에 흘러간 시간들을 그 옛날부터 급배속 화면으로 돌려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문턱 닳게 드나들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청춘은 늙어지고, 누군가는 종내 안 뵈이고, 또 진열대의 물건들은 시절따라 얼마나 변해 왔을 것인가.

할배가 도맡아 꾸리다가 세상을 뜬 후로 할매 혼자 이어온 세월만 헤아려도 근 20년.

“울 아그들이 인자 귀찮한께 힘든께 하지 마라고 맨나 그래싸.”

그때마다 할매의 대답은 “나 할 일”이라는 것.

 

▲ 동네 점방의 벗, 주판과 외상장부

 

점방 건사를 당신의 소임으로 정해둔 할매는 여전히 기억력 총총하다. 마을 사람들 누구든 외상이라도 할라치면 외상장부에 적어두고 가지만, 할매 머릿속에 이미 훤하다. 할배 때부터 써온 주판알을 굳이 튕겨보지 않아도 계산 틀림없다.

“우리 아들이 반장을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했는디 반에서 쓸 돈을 아그들한테 받아서 모태노문 내가 항시 말했어. 놈의 돈은 절대 손대문 못쓴다고.”

‘놈의 돈’ 앞에 엄중한 것은 점방을 하면서 할매가 지켜온 철칙.

“천원 받아야 할 때 백원이라도 더 오문 얼릉 돌려줘. 우리는 팽생 놈의 돈을 무섭게 알고 중히 알고 살아. 내가 놈의 집 짝은방살이를 6년을 했어도 놈의 정제서 암도 없을 때 물도 한번 안 떠묵은 사람이여.”

괜한 일에도 “여럽네”라는 말을 자주 올리는 할매지만, ‘놈의 돈’은 동전 하나도 ‘둘러묵은 적 없기때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여러움 없다.

안방에 자리한 돈통은 나이를 많이 잡수었다. 창업동지이다. 손때어린 자국자국이 이 점방에 서린 역사를 증거한다. 돈통은 대체로 열린 채다.

“괜찮애. 아무도 안 돌라가, 하하하.”

방심(放心)은 때로 방심(芳心)이 되나니.

낡았으나 새 돈통 마련할 필요는 없다.

“인자 더 벌 일도 없응께.”

할매는 안다. 자신의 운명과 이 점방의 운명이 같으리라는 것을.

“이 동네 점방은 인자 이거 한나여. 두 개 있다가 한나 남았어.”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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