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보리타작 하던 날

▲ 이 많은 보리가 눈을 감았으니...

드디어 그날이 왔다. 양파 농사를 망친 김기수씨가 보리타작을 하는 날,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린 것은 아니라 해도, 오늘이냐 내일이냐 관심을 갖고 기다려 왔던 것만은 사실이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오전 9시.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는 사람들에게야 오전 9시는 한낮이겠지만, 나처럼 한밤중에 자다가 일어나서 백일몽도 아닌 공상에 상상에 온갖 잡생각으로 에너지를 소비하고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사람에게 오전 9시는 두 말이 필요 없는 아침 일찍임이 분명하다.

“어? 저게 뭐예요?”

내 옆의 그녀가 놀랍다는 소리를 낸다. 나도 보고 있었다. 꿩이다. 어린 녀석들이다. 세 마리? 네 마리? 모르겠다. 논두렁에서 먹을 것을 찾던 녀석들이 자동차 소리에 놀라 딴에는 도망을 친다고 쳤는데 그만 자동차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녀석들은 자동차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작은 몸에 작은 다리로 종종종, 아니 쏜살쏜살, 하는 식으로 달아나고 있는 어린 꿩들의 뒤태가 볼만했다. 절로 웃음이 터진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이 뒤뚱뒤뚱, 아슬아슬한 걸음을 아마도 일 초에 족히 서른 걸음은 내딛고 있었으리라. 날개가 있어서 날아 왔던 것일 텐데도 날아갈 엄두는 내지도 못한 채로 그저 쏜살쏜살, 하고만 있던 녀석들이 결국은 농로 옆 고랑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는 듯, 아 참 나한테 날개가 있었지, 하는 투로 날개를 펴고 날기 시작했다.

웃음이, 미소가 멈추질 않는다. 웃고 있는 내 눈앞으로 저 먼 시절의 삽화가 홱홱 지나간다. 내가 아주 꼬맹이었던 시절에 나는, 우리는 곧잘 보리밭을 헤매고 다녔더랬다. 목적은 하나 꿩 알을 줍기 위해서였다. 꿩 알을 깨서 대파 속에 흘려놓고 그것을 삶으면 아주 맛있는 반찬이 되기 때문이었다.

 

▲ 보기엔 멀쩡해도 영글이 없다.

 

그 시절에 보리밭은 꿩들이 알을 낳고 품고 깨어난 새끼 꿩들이 활개를 치는 이를테면 꿩의 산실이요 인큐베이터였다. 꿩들은 왜 보리밭에 알을 낳는 것일까. 그리고 왜 다른 때는 알을 낳지 않고 보리가 막 자라서 배동을 할 무렵에만 알을 낳는 것일까. 궁금해서 고모님에게 여쭤본즉 고모님 말씀이 명언이었다.

“새끼들 키울라고 그러제.”

그 시절에는 그렇게만 알았다. 아 그렇구나. 새끼들 키우려고 보리밭에 꿩은 알을 낳는구나. 그렇게 막연하게, 그러니까 모르면서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았다. 내가 가령 문제의식이 출중한 비범한 녀석이었다면 그 시절에 분명 봄날의 보리밭이 새끼들 키우기에 좋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또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범상한 사내꼭지일 뿐이었다. 범상한 사람은 십 년 뒤의 일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보지를 못하고 저게 뭐지? 왜 저런 거지? 하고 의아해 하다가 흐지부지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아무튼 봄날의 보리밭은 꿩들의 낙원이었고, 우리들의 사냥터였다. 멀리서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보리밭 어딘가에서 암꿩이 퍼드득 날아오르기도 하고,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비행기처럼 하늘에서 땅으로 꽂히듯이 내려앉기도 했다. 암꿩이 내려앉거나 날아오른 그 지점을 표적으로 삼고 달려가서 보면 거의 어김없이 푸른색을 띤 꿩 알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주워다 먹고, 또 먹었어도 꿩 알은 남아 있어서, 보리 이삭이 누렇게 익어갈 즈음이면 언제 알을 깨고 나왔는지 도토리를 연상케 하는 새끼 꿩들이 통통 튀는 공처럼 뛰어다녔다. 녀석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위험한 원정을 나설 필요가 없었다. 익어가는 보리알을 콕콕 쪼아서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보리가 다 익어서 보리 베기가 시작될 즈음이면 녀석들은 다 자라서 자기 목숨은 자기가 알아서 관리할 정도가 돼 있는 것이니, 보리밭을 산란장으로 선택한 암꿩의 육아전략은 완전한 성공은 아니라 해도 최소한 실패는 아닌 셈이다.

“아따 그새보 한 차 해버렸는 갑소 야?”

“우덜 일이야 머, 시작하믄 반인게요.”

 

▲ 허헛, 그냥 웃어야지요.

 

역시 우리의 이른 아침은 김기수씨처럼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는 사람에겐 한낮이었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섰을 때 김기수씨 부부는 수확한 보리를 트럭에 하나 가득 싣고 와서 건조장 앞에 내려놓고 있었다. 아내는 보리가 가득한 마대자루를 잡아주고, 남편은 지게차로 그것을 들어 내리는데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 짧았다.

트럭으로 하나 가득 보리를 싣고 왔다고 했지만 마대 자루로 달랑 두 개였다. 달랑 두 개지만 그 무게는 자루 하나에 1000kg 즉 1톤이란다. 그러니까 한 번에 2톤, 2000kg을 수확해서 가져오는 셈이다. 그것을 바닥에 쏟아놓으면 아마 커다란 무덤 하나만큼은 될 거다. 이만한 양을 수확하는 데 한 시간도 채 안 걸린다 하니, 재래식 농사밖에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게 인건비를 팍팍 줄이고 있는데도 호주나 미국 농산물과는 경쟁이 안 된다고 하니, 이중의 놀라움이다.

보리밭의 규모도 나로서는 놀랄만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끝이 안 보인다. 그야말로 널따르다. 나무도 단 한 그루가 없다. 작은 구릉과 언덕으로 이루어진, 색깔도 좋은 끝없는 황토 위에 있는 것이라고는 누렇게 익은 보리들뿐이다. 이 많은 보리를 처리하자면, 재래식 농법으로 하자면 베어내는 데만도 아마 십여 명이 달라붙어서 열흘은 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보리 수확하는 날 보리밭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한 명, 탈곡기 운전기사뿐이다. 운전기사 혼자서 기계를 타고 앉아 버튼과 기어를 조작하면 보리가 척척척 베어진다. 베어진 보리는 기계 안으로 들어가서 몇 바퀴 돌고 나면 낱알은 낱알대로 기계 안에 저장되고, 보릿짚은 보릿짚대로 토해져서 밭으로 질서정연하게 깔린다. 주인 부부는 때에 맞춰 트럭을 몰고 와서 기계가 토해주는 낱알을 받아다가 건조장에 내려놓기만 하면 수확 끝, 하게 되는 것이다.

“이거 다 하는데 며칠이나 걸려요?”

“아이고 며칠은 무슨, 그러다간 굶어죽게요? 한나절도 안 걸려요.”

듣고 보니 아득하다. 사람 손으로 하자면 몇날며칠이 걸릴 일을 한나절에 뚝딱 해치운다니, 사람이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했는데도 호주나 미국 농산물과는 경쟁 자체가 안 된다니 무슨 할 말이 더 있으랴.

뜨겁다. 태양이, 날씨가, 오살직살맞게 뜨겁기만 하고, 숨이 컥컥 막힌다. 잠깐 숨을 돌리고자 해도 나무가 없으니 그늘도 없고, 앉아볼 엄두가 나지를 않는다. 하는 수 없이 트럭 그늘 덕이라도 좀 보자고, 트럭 옆으로 뽀짝짝뽀작 붙어 앉아서 마실 것을 꺼내든다. 남편은 캔 맥주를 꺼내고, 아내는 캔 맥주와 캔 커피를 양손에 하나씩 꺼내들고 쑥 내민다.

 

▲ 션한 맥주 한 개 드셔요~

 

“시원허게 맥주 한 잔 하셔요.”

“아이고 저는 맥주 말고 커피나 한 모금 할라요.”

“에이 그러지 마시고 한 잔 하셔.”

그 마음이야 당연히 고맙지만 받을 수가 없다. 뜨거운 날 땡볕에서의 차가운 맥주는 내게 쥐약이기 때문이다. 한 모금 마시면 두 모금을 마시고 싶고, 그리고 계속 마시고 싶어진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는데 어쩔 것인가. 나는 보리타작 현장을 견학 나온 것일 뿐, 술이나 퍼마시자는 게 목적은 아닌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삽화 하나가 또 지나간다. 그 시절에 보리타작은 보리타작을 막바로 하는 게 아니라 보리 베기 과정이 먼저 있었다. 저마다 낫을 들고 모여든 사람들이 보리를 척척척 베어 내고 나면 그것이 마르기를 며칠씩이나 기다리고,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비라도 내리면 그것들을 죄다 일일이 뒤집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 말랐다 싶으면 묶는다.

묶은 것을 그대로 집으로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다른 일이 바쁘고, 일손도 없기 때문에 논두렁이나 밭두렁 여기저기에 임시로 쌓아놓는다. 그러다가 다른 바쁜 일이 대충 끝나고 일손도 다소 여유가 있어지면, 오늘은 우리 것, 내일은 너희 것, 하는 식으로 지게로 온 종일, 어떤 때는 밤늦게까지 져다가 마당에 또 쌓아둔다. 타작은 일손을 많이 필요로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에, 다른 집 보리타작과 겹치지 않도록 날짜를 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날이 오면, 아이들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안 그래도 후텁지근한 날씨에 그만 미쳐버릴 것만 같은데, 보리 특유의 꺼끌꺼끌한 수염 같은 것들이 잘게 부서져서 허공을 부유하다가 사람 몸에 자꾸만 내려앉고 있으니, 누가 뭐라고 한 마디만 거칠게 하면 그냥 팍팍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그러다가 그만 엉엉 울어버린다. 게다가 그놈의 보리꺼시락은 물로 씻어도 잘 씻기지 않고, 마치 살 속에 뿌리를 내려버린 것처럼 긁어도 가려움이 가시질 않으니, 어른들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투덜대느라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 아이고 살겄다.

 

“그런데 보리가 좀, 영글이 이상해네요?”

마대 자루에 쏟아놓은 보리알 한줌을 집어들고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다. 이상했다. 내 어린 시절의 보리알은 영글이 통통해서 먹음직스러웠다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김기수씨네의 금년 보리는 하나도 안 통통한 것이 흡사 말라비틀어진 노가리 같은 것을 연상케 한다. 내 말을 들은 김기수씨의 표정이 금방 일그러진다.

“맞어요. 죄다 눈을 감아버렸어요.”

“눈을 감아요?”

“야. 눈 뜨고 하늘을 봐야 영글이 드는 것인디, 눈 감고 땅이나 보고 있었으니, 영글이 들 까닭이 읎는 거제요.”

작물이 눈을 감는다는 얘기는 금시 처음이어서, 그 말뜻을 이해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겨우 이해를 하고 보니 이번에도 하늘이 문제였다. 엄동설한 겨울을 난 보리가 한참 자라는 계절에 하늘이 사흘이 멀다고 비를 뿌려댔으니, 보리가 제대로 서지를 못하고 태반이 주저앉았고, 이삭이 나올 무렵에는 또 비를 너무 안 뿌려줘서 보리들이 죄다 비실비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끝내는 눈까지 감아버리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비가 없어야 할 때는 비가 너무 많아버렸고, 비가 있어야 할 때는 또 하나도 없어버린 탓에 보리농사가 이렇게 돼 버렸다? 하아 참, 고달픈 인생길이네요 잉?”

“산다는 것이 다 그렇제요 뭐. 공부 많이 하고 있네요.”

김기수씨는 정통 농사꾼(?)은 아니었다. 광주에서 금속노조 조합원을 했었다. 조합원 자격을 반납한 뒤에도 대규모 집회가 열리면 달려가서 응원을 했을 정도로 충성도 높은 노동자였다. 그런 그가 이십여 년 전 귀농을 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도시는 사람을 자꾸 한쪽으로 밀어내며 천대하기 때문에 사람이 살만한 데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시골 생활을 시작한 지도 이십 년이 넘은 지금은?

 

▲ 부부일심동체이니...

 

“시골은 아무래도 생명을 다루니까요.”

그래서 도시보다는 삶에 의미 같은 것이 있다는 뜻인가 보았다. 더 이상은 묻지 않기로 했다. 그가 처음 시골에 와서 시작한 게 버섯 농사였더란다. 그런데 버섯 농사가 여기저기 막 생겨나서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손을 댄 게 남의 땅을 빌려서 하는 밀 농사였고, 보리 농사였고, 콩 농사였다. 가끔 양파와 수박에도 손을 대기는 하지만고, 밀과 보리와 콩이 그의 주된 농사였다.

내 땅이 없어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다는 건 일견 슬픔이기도 하지만, 보람은 있단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포기하자는 생각도 없이, 매년 매해 씨를 뿌려야 할 계절이면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해야 할 계절이면 추수를 한다는 것이다.

금년 농사는 어쨌든 양파는 그 양이 너무 많아서 망쳤고, 보리는 하늘이 비를 너무 많이 뿌려서 망쳤으니, 이제 남은 것은 콩이었다. 보리타작을 끝내고 나면 콩을 심는데, 콩이 영글어가는 계절에 태풍이라도 큰놈이 몰려오지 않기를 바라고 또 소망해 본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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