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세 할머니의 집-해남 박길님 할매 집②

 

‘남들처럼’을 따르지 않고 ‘내 식대로’ 살아온 할매.

“팽생 낭자머리여. 물도 안 딜애, 팽생.”

이날 이때까지 파마머리는 딱 한 번 해봤다.

“칠십 살 다 묵어서 한 번 했는디 영감님이 하지마라 그래. 싸납게 보인다고. 머리가 앙상(엉성)해. 빠마도 거천을 해야제, 맨나 일만 하고 산께 머리가 안 이삐던만. 이때끔 빠마는 다시 안해.”

‘비녀’라는, 일상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물건이 할매의 머리 뒤에 늘 현재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할매의 아침을 여는 의식은 머리를 매만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낡은 달력을 펼친다. 도르르 말려 있던 달력종이가 펼쳐지면 그 안에서 참빗과 가지색 머리끈, 흰 면장갑 한 짝이 나온다.

 

▲ “이날팽생 아적마다 하는 일이제.” 단순한 듯 장중한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할매의 아침을 여는 의식. 동백기름병과 참빗, 비녀는 그 의식을 집행하는 데 필수.

 

허리께 닿을 듯한 긴 머리. 가운데에 가리마를 타서 찹찹하게 빗어내려 한 갈래로 모은 다음 가지색 긴 끈으로 돌려 묶고 그 끈을 입에 질끈 물고 머리를 두 갈래 내어 새내끼 꼬듯이 한 가닥으로 땋은 다음 머리 뒤쪽으로 넘겨서 틀어 올리고 비녀를 찔러 꽂는다. 단순한 듯 장중한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흰 면장갑 한 짝의 용도는 동백기름 바른 머리를 만지는 동안 손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내는 것.

“동백지름을 꼭 볼라야제. 안 보르문 엉성해. 동백지름은 제주 사는 우리 아들이 안 떨치고 사와.”

 

 

동백기름병과 참빗 등등 달력 위에 올려진 고전적 아이템들은 할매의 손길 속에 여전히 현재형의 숨을 얻고 있다. 장갑을 끼고 손에 묻은 기름기를 부벼 닦아낸 다음 달력 종이를 다시 도르르 마는 것으로 아침의 의식이 끝난다.

동백기름 바른 머리를 쪽지고 사는 할매는 일요일이면 늘 한복을 차려입는다.

“교회 갈란께. 교회는 점잔한 자린께 한복 입어야제.”

할매에게 의관정제란 어디까지나 한복을 갖추어 입는 것. ‘점잔한 자리’라면 어디든 당연히, 한복을 입어야 한다.

교회에 가는 날 아침이면, ‘목간통에서 시치는 것’은 필수. 잔뜩 추운 날도 빠뜨리지 않는다. 정화수 떠올리고 비손할 때 할매들이 몸과 마음을 정히 했듯.

 

 

장독대 앞이나 정제 부뚜막 조왕물그릇 앞 같은 일상의 공간을 성소(聖所)로 끌어올린 것은 그런 마음가짐이었을 터. 교회로 장소는 바뀌었어도 그 마음가짐은 한결같다.

“내가 한복이 많애. 니 볼(네 벌)이여.”

아들 넷, 딸 하나. 그 자식들을 ‘여울 때마다 지은 한복’을 잘 건사해서 이날 이때껏 입고 있다.

“놈들이 그래, 내가 보지런한께 입는다고. 바지 입고 속치마 입고 보선 신고…. 한테다 벗어노문 수둑해. 놈들은 갰다 벗었다 안할라고 안 입는다던만. 근디 안 할라고 한께 귀찮제, 해버릇하문 괜찮해.”

해버릇한 그 손길로 95세 할매는 마당 텃밭에도 여전히 ‘폿이며 콩이며 꽤며 옥조시며 고로고로’ 길러내고 집 구석구석도 말갛게 건사하고 있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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