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책을 출판하다-2회> 김혜영

 

필자가 속했던 교지편집위원회는 학생들의 자율적인 후원금과 기업의 광고료로 일 년에 네 권의 책을 내는 단체다. 어쩌다 보니 교내 중앙언론이 되어버렸지만, 긴 글과 긴 호흡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탓에 언론보다는 독립출판사에 가깝다. 중앙언론에게 요구되는 언론협의회 업무나 정책토론회와 같은 일들을 수행하지만 스스로는 출판사로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편집위원들조차 단체의 정체성을 쉽게 정의하지 못하는 탓에, 매 호마다 필연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교내 언론이기 때문에 학내 이슈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언론이라기에는 시의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후원금을 받는 만큼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의견과 편집위원이 쓰고 싶은 글을 써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강하게 부딪혔다.

정체성이 뚜렷한 다른 언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기본적인 규칙이나 위계도 없는 단체에서는 늘 명확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뭐 하나 쉽게 해결되는 일이 없어 골치 아픈 일이었지만, 매 호마다 편집위원들끼리 합의하여 정체성을 규정하고 규칙을 확립해나가면서 더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려고 노력했다.

 

 

편집위원 입장에서는 꿈에 그리는 공동체나 다름없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독자들은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체성을 사랑해주었지만, 언론을 기대한 독자로부터는 아무런 규칙이 없는 문집을 읽고 싶지 않다는 쓴 소리를 자주 들었다. 무엇보다 짧은 글과 이미지가 사랑받는 시대가 되면서 긴 글은 많은 독자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했고 이제는 기업의 광고료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렸다. 애독자마저도 어떤 글은 너무 길어서 읽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고, SNS에 글의 일부를 올리면 뜨거운 반응이 있지만 글의 전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긴 글을 담아내는 교지는 시대의 흐름과 독자의 취향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마저도 다수에게 사랑받는 글보다 아무도 쓰지 않는 글을 지향하는 탓에 기업의 광고를 받는 것도 쉽지 않다. 정식으로 광고를 체결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고, 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 계시는 기업에 직접 찾아가 고개 숙여 후원을 부탁드리는 형식이다. 선배가 후배들의 자치활동을 지원해주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지만, 주 독자가 아닌 분들로부터 광고 형식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늘 복잡하고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교지편집위원회의 첫 번째 업무는 책을 출판하는 일이다. 첫 회의 시간에는 수다를 떨 듯이 여러 주제를 열거해보는 시간을 갖고 두 번째 회의부터 자신이 택한 주제의 기획안을 작성해온다. 기획안에는 기획 의도부터 문단별 항목까지 상세한 내용을 담고 회의를 통해 검증되면 초고부터 완고까지 글을 완성해나간다. 일주일에 있는 두 번의 회의 시간에 맞춰 두 개의 글을 써와야 하는데, 매 회의마다 꼼꼼한 피드백을 받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글을 쓰는 수준이다. 자료조사나 취재를 위해 따로 마련된 시간은 없고, 한 글의 분량이 대개 7장 수준이어서 학업과 병행하다 보면 텍스트 노이로제도 생긴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한계를 계속해서 마주하고 좌절하는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책을 만드는 것은 그 단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일이었다.

 

 

물론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진해서 뛰어든 일이라 글쓰기 자체에 큰 불만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있는데, 바로 실무다. 아무리 글이 중요한 책이어도 디자인은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글이 완성되기 전부터 회의를 통해 디자인을 결정하고 전문 업체를 골라 끝없는 피드백의 늪에 빠져야 한다. 디자인 시안이 나오면 매 회의마다 글과 디자인을 낱낱이 파헤치고 업체와 연락하며 치열한 피드백을 전달하는 것이다. 동시에 직접 기업을 돌아다니며 광고를 부탁하고, 독자모임을 열어 독자들의 피드백을 글로 싣고, 편집장의 여는 글과 편집위원들의 편집 후기, 주변 지인에게 부탁한 투고를 받아 피드백 회의를 거친다. 그렇게 글과 디자인이 완성되면 인쇄소에 파일을 넘겨 책을 인쇄하고, 만들어진 책 1000~2000부 가량을 학교 캠퍼스 곳곳에 직접 배포한다. 언론협의회 업무나 학생회 선거 시즌의 업무, 교내 문학상 관련 업무와 신입 모집 및 매뉴얼 갱신은 일일이 늘어놓기도 어렵다.

학생의 신분으로 단체를 운영하고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듯 수많은 일들을 거쳐야 하며 요즘 흔히 쓰이는 ‘열정페이’를 착취당해야 한다. 정작 글 쓰는 시간은 많지도 않고, 과제처럼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이나 논문을 바탕으로 써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운 주제로 직접 개요를 짜고 심도 있는 글을 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도, 글을 써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편집위원 대부분이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아 책을 내기 전 꼭 한 번씩 몸살이 났다. 어느새 교지편집위원회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는 곳이 되어버렸다. 슬픈 일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입 편집위원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편집위원이 되었지만, 이제는 지원자의 수가 적어 모집 기간을 세 배로 늘리고 책의 출판일도 늦췄다. 그마저도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들어온 이들이 늘어나며 기본적인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많고, 마감을 독촉해도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무관심하다. 최소 일 년 정도의 활동 기간을 가져야 글쓰기 실력이 늘고 실무에 적응할 수 있는데, 요즘의 대학생은 학기 별로 스케줄이 정해져서 한 학기 이상 활동을 지속하는 것도 어렵다. 결국 매번 경험이 없는 새로운 편집위원들로 호가 꾸려져서 편집장 홀로 대부분의 실무를 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필자가 수습편집위원이었을 때도 교지의 앞날을 걱정하는 분위기였지만, 편집장이 되고 나서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교지는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전 호에서는 교지의 아름다운 면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교지의 실상은 이러하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나 홀로 무리해서 만들고 있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나는 책을 사랑하고 교지를 사랑한다. 학내 이슈를 재빠르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장기적인 취재를 하고 긴 글로 분석하여 파헤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깊게 생각하고 고민하며 쓴 글이 독자에게 진심으로 와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긴 글만이 전달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도 계속 책을 사고, 새로운 멤버들이 만든 교지를 주변인들에게 나눠주며 한 글만이라도 읽어보라고 말한다.

교지를 만드는 동안 마음 놓고 쉬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는, 학생사회가 위기를 넘어 멸망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었지만, 동시에 긴 글을 읽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정보 습득을 목적으로 글을 읽는 것도 좋지만,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긴 글을 읽는 것은 어떨까. 이 시대에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당신과 같은 독자를 간절하게 기다리며 온 마음을 다해 글을 썼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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