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더불어 웃고 울며 세상을 경작
이웃과 더불어 웃고 울며 세상을 경작
  • 심홍섭
  • 승인 2018.07.16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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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산골마을 이야기 - 장흥 장평면 청룡마을
▲ “똥값이 돼도 농사는 지서야제. 어찌게 땅을 놀려.” 그 마음들이 일구는 초록.

요즘 같으면 시골마을 가기가 민망할 때가 많다. 농사일로 한창 바쁠 때인지라 붙들고 말씀 여쭙기도 죄송스럽기만 하고 모두 들로 산으로 일하러 가는 바람에 마을에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도 걸음은 오늘도 마을로 향한다. 가지산 너머 장흥군 장평면 봉미산 자락에 자리한 청룡(靑龍)리 청룡(靑龍)마을.

 

▲ 용을 새긴 청룡마을 표지석

 

뒤로는 봉미산이요 서로는 큰 음당골을 사이에 두고 부어등이 그리고 멀리 가지산이 마을을 감싸고, 동으로는 음당골을 사이에 두고 야트막한 안산이 마을을 감싸고 남으로는 멀리 용두산이 떠억 버티고 앉았으며 마을 앞으로는 장평천(마을 사람들은 죽천이라고 부른다)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니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 모판 들어차서 집 마당들이 푸릇푸릇하다.

논밭 갈며 새싹 같은 소망을 키워낸 둥지

마을 앞 북포들과 가리데들을 지나가니 소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민묘가 있고 마을 당산숲이 반긴다.

마을을 위해 논 800평을 희사한 용강 강내회의 공적비 옆 당산숲 아래 2006년 4월에 청룡리 마을회관을 건립하면서 이정우라는 분이 남긴 비가 있다. 내용을 읽으니 참으로 절절하다.

<여기 푸른 용의 언덕, 청룡마을이 있습니다. 아이를 기르고, 논밭을 갈면서 새싹 같은 소망을 맑디맑게 키워낸 우리들의 둥지입니다. 한 뙈기의 땅과 한 그룻의 쌀밥을 얻기 위해 이웃과 더불어 웃고 울면서 세상을 경작했던 너와 나의 일터입니다.

여기 푸른 용을 닮은 청룡사람들이 있습니다. 꿈을 좇아 어떤 이는 도회지로 제 둥지를 옮겼고, 또 어떤 이는 더 깊고 단단하게 마을의 일터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떠난 자, 남아 있는 이를 모두가 푸른 용이 낳고 봉미산이 길러낸 청룡사람들입니다.

청룡은 청룡사람들의 고향입니다. 고향에 관한 기억이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닐 터입니다. 누구에게나 좋고 나쁜 혹은 즐겁거나 슬펐던 일들이 가슴 한 쪽에 아리게 간직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서 청룡사람인 당신과 당신의 가족까지를 어머니의 보드라운 품, 아버지의 든든한 어깨가 되어 따뜻하게 품어줄 것입니다. 당신이 청룡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청룡마을 앞. 고향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한말의병과 한국전쟁 흔적 담긴 초장골

‘장평에서는 돼지농장 꿈도 꾸지마라’고 적힌 현수막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니 오래 전에 문닫은 동네 구멍가게가 있다.

여닫이문은 커튼이 쳐진 채 닫혀 있고 우체국에서 달아 놓은 ‘우표 간판’이 곧 떨어질 듯 위태롭게 붙어 있다. 마을이 150여 호 되고 사람이 많을 때는 오가는 사람들이 막걸리라도 한잔씩 하면서 쉬어가던 사랑방이 었다는데 지금은 흔적으로만 간신히 버티고 있다.

청룡리라 부른 것은 뒷산이 봉미산(鳳尾山)이니 봉(鳳)과 용(龍)이 짝을 이루어서 청룡이라 하였다. 혹자는 마을이 배 형국이라 하여 주리(舟里)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마을 안에 우물을 파면 배 밑창에 구멍이 나게 되어 배가 침몰하듯이 마을이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도 샘을 파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청룡리’라고 처음 기록된 것은 호구총수에 나온다. 다만 마을에 전해지기를 1900년대에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인천이씨인 이록수가 산세가 좋아 입촌하였다고 하고 그 후 광산노씨가 입촌하였다 하나 기록은 없고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질 뿐이다.

마을 뒤로 가니 초장골이 있다. 1909년에 의병장 심남일(1871~1910) 부대가 이끄는 60여 명의 의병이 초장골에서 은거하고 있다가 당시 마을에 있던 헌병 파견소를 급습하기도 했다. 또 한국전쟁 당시에는 초장골에 은거하고 있던 ‘잔비(殘匪)’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150호 중 두 집만 남기고 불을 질러 마을이 소실되는 화를 당하기도 했다.

 

▲ 쌀이, 농사가 ‘백만장자’를 만들어준 시절은 한번도 없었지만 노병채 할아버지는 평생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똥값이 돼도 농사는 지서야제”

마을은 조용하다. 마을 앞 북포들 가리데들에서 트랙터가 모판을 만드느라 분주하게 오갈 뿐이다.

“사람이 흘 게 있가니. 요새는 기계가 다 알아서 흐제.”

오래된 옛집 지붕이 보여 들어간 골목 끝집에서 만난 노병채(87) 할아버지의 말씀이다.

“마지기당 로타리 치는 디 4만원, 모 심는 디 9만원, 나락 비는 디 4만5천원, 몰리는(말리는) 디 2만5천원 해서 마지기당 150만원 잡아야 농사 져(지어). 자식들이 다섯인디 같이 노놔 묵고나 살겄다고 짓제, 돈이 되간디. 힘에 부쳐서 요것도 올해까지만 흐고 내년까지는 못 흐겄소.”

 

▲ 농사꾼의 일벗, 연장들이 가지런하다.
▲ 밥바구리. 항꾼에 밥 먹으며 그득그득 웃음 넘쳐나던 시절은 지나가고.

 

할아버지는 정부 보조도 없이 건조기도 직접 설치하여 40마지기를 농사지을 때도 있었지만 얼마 전에 경운기 타고 집에 들어오다 벽을 박는 바람에 손목을 다쳤다고 한다.

“차는 사고가 나문 멈추기라도 흐는디 요놈의 경운기는 자빠져도 끄지 않는 이상은 한허고 가요. 그러다가 사람도 간단 말이요” 하면서 손목을 만져 보는 할아버지.

“로타리 쳐 놨다고 해서 한번 나가 볼라고.”

할아버지는 나가는 길에 전동차에 비료라도 싣고 가려고 다친 손으로 비료 한 포대를 싣는다. 시골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집 마당에도 모판의 모들이 가득가득 자라고 있다.

“똥값이 돼도 농사는 지서야제. 어찌게 땅을 놀려.”

 

▲ “마당에 시멘트할 돈이 없어서 콩을 심궜어. 아그들이 일 흐지 마라고 흔디 풀이 나문 보기 싫어서.” 정동댁.

 

무너진 담장 뒤로 감자며 상추가 푸르게 자라고 있는 골목길로 들어가니 담장도 없는 마당에 콩이며 상추가 난 집이 있다. 보성 노동면 정동이라는 마을에서 17살 되던 해에 25살 신랑한테 시집왔다는 정동댁(91)이 방안에 있다 마루로 나오신다.

“마당에 시멘트할 돈이 없어서 콩을 심궜어. 아그들이 일 흐지 마라고 흔디 풀이 나문 보기 싫어서. 것도 올해만 흐고 안흘라요.” 정동댁 할매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마당을 가만히 내려다 보신다.

“이 집도 영감이 지서 준 집 그대로여. 나가 죽으문 이 집도 없어질 것이요.그나 점심은 자셨소? 회관에 가도 사람이 없어서 흔자 그작그작 밥 묵고 사요.”

겨울 동안 광주에 사는 아들 집에 있다가 봄과 함께 돌아왔다는 할매는 마당에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

할매한테 건강하시라고 인사드리고 집을 나섰다. 봄바람 불고 모란이 피는 골목을 나오는데 개가 길바닥에 팔자좋게 늘어져 누워 있다. 그 옆으로 아직도 노병채 할아버지는 비료를 실은 전동차를 몰고 가고 있는 중이다.

글·사진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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