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국영화사 훑어보기 - 9회 <칠수와 만수>

영화소개 : <칠수와 만수>, 1988년작, 감독 박광수, 출연 안성기, 박중훈, 배종옥 등

▲ 영화 <칠수와 만수> 포스터

“나아가 현대 한국영화는 더 이상 국가권력의 정치적 음모에 주눅들지 않는다. 진보에 대한 이념적 동의도 선택의 문제이다. 오히려 저항권에서 사회 핵심으로 자리 옮겨가기에 성공한 이들은 정치화가 절대적 잣대처럼 군림했던 스스로의 과거로부터도 차별화를 추구하며 새로운 개체적 반항을 시도한다. 이들에게 정치적 공조는 과거의 언어이다. 정치권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는 작가들의 극단적 폭력성, 엽기성, 성적 가학성을 수반하는 남성주의적 역사해석과 문명비판은 탈사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는 투사가 되지 않는다면 비겁자로 몰려야 했던 사회적 격정기 1980년대를 산 세대들의 편협한 보상심리일지도 모른다.” - 『한국영화의 초국가성과 정체성의 정치학 : <춘향뎐>과 <오아시스>』 중에서, 이향진

1988년에 개봉한 영화 <칠수와 만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80년대 영화라는 딱지를 떼기는 어렵다. 80년대는 한국 사회 전반에 있어서 격정기에 해당했고, 그 시대에 나온 영화들은 그런 정치적, 사회적 불안감을 영화 전반에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칠수와 만수>는 칠수와 만수라는 인물을 통해 80년대가 갖는 시대성과 정치적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 사건들도 중요하지만, 영화의 제목에서 인물의 이름들을 내세우듯이 더 중요한 것은 인물들이 갖는 캐릭터다. 칠수와 만수는 별다르지 않은 인물들이다. 평상시에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을만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니, 한 명은 지나치게 우울하고 한 명은 지나치게 허영심에 빠져있다. 특이할 것 없이 평이한 주인공 둘은 철저히 소시민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둘은 부자가 될 마음도, 그렇다고 가난을 즐기지도 않는다. 그저 그런 삶,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둘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에 이유가 있다.

그때부터 둘의 모습은 코미디에 가깝게 그려진다. 아무리 봐도 분명 평범한 소시민인 둘이지만, 어느 순간 그 평범한 모습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보다 모자라고 어설픈 것만 같은 이미지를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정체성은 그 순간부터 리얼리티극이 아닌, 자조극으로 변한다. 이 영화에서 주는 웃음은 어느 부분에서 비롯되는가. 1980년대라는 격정기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평범하게 살아가고, 그 삶이 얼마나 웃긴 것인가. 그것은 정치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비추는 거울을 보았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그 거울이 바로 영화다. 누군가는 극단적 폭력성, 엽기성, 성적 가학성으로 문명을 비판하지만 <칠수와 만수>는 거울의 속성으로 문명 비판에 나선 것이다. 칠수와 만수라는 우리와 너무나도 똑같은 캐릭터를 거울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우리에게 자조를 주고 스스로 주어진 문명을 비판할 수 있게끔 만든다.

“한국의 근대는 하나의 문명화 과정이다. 그리고 ‘문명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문명은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갖고 있다. 문명 없는 야만은 있을지 몰라도 야만 없는 문명은 없기 때문이다. 한 문명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야만의 얼굴에 대한 평가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의 근대라는 문명화 과정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근대는 문명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야만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한국의 근대라는 야누스는 그 두 얼굴 중 어느 쪽으로 더 많이 향하고 있는가. 결국 핵심은 이것이 아닐까.” - 『세월호와 ‘디자인 서울’ 한국 현대 디자인에 대한 성찰적 메모』 중에서, 최범

영화 <칠수와 만수>의 문명 비판은 근대화 과정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덧씌워진 야누스적 성질에 기반하고 있다. 누가 문명이고 누가 야만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칠수와 만수가 옥외 광고판에 올라간 것을 두고 사람들은 떨어질까 두려워하며 쳐다본다. 그들은 문명의 시선으로 칠수와 만수라는 야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칠수와 만수의 입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애초에 그들은 떨어질 마음조차 없었을 뿐더러 제발 내버려두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야만이 문명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문명 역시 야만이 된다. 사회라는 군상은 칠수와 만수 같은 개개인을 끔찍하게 탄압하고 억압한다. 문명이라는 찬란한 이름하에 그들을 엮어두려고 한다. 소시민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포기하고 문명에 순응한다. 이런 당연한 이치를 거부한 칠수와 만수는 반사회적, 반문명적 인물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소시민적 삶을 모조리 앗아간 문명 사회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이 둘을 억압한다.

옥외 광고판에 올라간 칠수와 만수, 그리고 군대와 경찰, 구조대 간의 대립은 문명과 문명이 아닌, 야만으로 불리는 것, 간의 대립 구도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구도는 한 쪽의 붕괴를 당연히 예견하고 있는 것이었다. 칠수와 만수는 수적으로도 열세이고 언제까지나 옥외 광고판에서 농성을 벌일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칠수는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그런 열세인 대립 구도를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구조대가 올라오고 결국 칠수는 그들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 전까지 만수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어떡해야 하냐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칠수는 구조대에 순응하게 되고 만수는 또 다른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을 칠수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던 것일 테다. 마지막 야만으로 남고 싶었던 만수는 떨어질 마음이 애초에 없었음에도 광고판에서 투신한다. 대립의 구도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문명과 야만은 서로 맞설 수가 없는 불균형성에 기반하고 있다. 만수의 투신은 그 불균형성의 끄트머리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바였다. <칠수와 만수>의 문명 비판은 비극으로 끝이 나고 마는 것이다.

 

▲ 영화 <칠수와 만수> 스틸컷

“달리 말하면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가치의 지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것이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것처럼 근대화 과정이 주체적이지 못하다 보니 정작 합리적인 것을 비합리하다고 받아들이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그 결과 서구적 근대화를 체계적으로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절대적인 것으로 숭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은 수평적으로 융합하지 못하고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은 열등한 것이고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것은 우월한 것이라는 이중적 구조가 만들어졌으며, 바로 이러한 심성과 의식이 근대 한국 사회의 모든 부문을 지배했다.” - 『근대화, 미의식, 디자인』 중에서, 최범

<칠수와 만수>에서 비판의 중심이 되는 문명 사회는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까. 당연히 그 근원은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화는 그런 가치의 지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서구적이며 근대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배척하는 태도를 사회는 취하게 된다. 영화에서 칠수와 만수 역시 그런 가치관에 입각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칠수는 서구적인 것을 꿈꾸고 흉내 내지만 사회적 환경이나 그가 살아온 삶이 그런 가치를 좇지 못하게 만들었다. 만수는 스스로 그 가치를 거부하는 인물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서구적이며 근대적인 사회로부터 벽을 세운다. 그런 칠수와 만수의 삶은 결국 사회적 패배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사회가. 정작 우리 사회는 전혀 서구로부터 또는 근대로부터 비롯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칠수가 사랑했던 대학생 지나는 칠수와 만수와는 정반대로 철저히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생활 속에 들어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녀의 집안 환경이나 사회적 배경도 그렇고, 그녀가 향유하는 문화와 삶 역시 그러했다. 그렇기에 칠수와 만수는 화백이니 뭐니 흉내 내가며 그녀의 생활을 따라가 보려 했지만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칠수와 만수는 야만이었고 지나는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삶들을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인물들 간에 그런 이해불가능성이 생겨난 것일까. 문명과 야만의 불균형적 대립을 야기하는 것은 정치 사회였고, 칠수와 만수 그리고 대학생 지나가 서로에게 남발했던 것도 정치적 행위였다. 결국엔 정치 사회 속에서 그들은 서로 틀어지고 서로에 대한 오해를 쌓아가게 된다. 소시민의 삶은 이렇게 정치 사회에게 잡아 먹혀버리고 만다. 그것은 힘이 없는 소시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말하자면 소시민의 삶은 순응에 익숙해져버려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는 어느 편을 택해서 삶을 영위하고 있을까. 1980년대 격정기를 지나서, 과연 소시민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남아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곤,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것에 완전히 푹 젖어버린 우리의 모습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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