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록의 어른을 위한 동화>

나는 이 땅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이야.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변덕을 부리지. 고요히 잠든 풀잎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는가 하면 어느 때는 느닷없이 폭풍이 되어 아름드리나무를 뿌리째 뽑아놓기도 하고. 그뿐만이 아니야. 세상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땀을 들여 주는가 하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에는 연인들의 옷 속을 파고들어 화들짝 놀라게도 하지. 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봐. 숨 가쁘고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야.

나는 수십 채의 집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도 있지만 되도록 좋은 일만 하려고 애쓰지. 허공을 떠다니다 간혹 내 맘에 어긋나는 일이 벌어질 때도 있지만 말이야. 그럴 때면 차라리 땅 속 깊이 숨어버리고 싶지.

 

 

올 여름만 해도 그래. 나는 열심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안겨 주고 말았어.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까? 하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순수하고 참된 마음을 지니기가 참으로 어렵지.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말이야.

이 세상에 나처럼 여러 이름을 갖고 있는 것도 드물 거야. 실바람, 잔바람,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강바람, 갈바람, 하늬바람, 산들바람, 소소리바람, 황소바람, 회오리바람, 북풍, 남풍, 동풍, 솔바람, 골바람까지. 계절과 불어오는 방향, 그리고 강약에 따라 내 이름은 수시로 바뀌지. 그렇지만 나는 내 이름이 이렇게 많은 게 늘 불만이야. 왜냐하면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이가 드물거든. 높새바람을 소소리바람이라 부르고 샛바람을 갈바람이라 부르고….

나는 천진한 한 아이를 알고 있지.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느냐고? 그냥 편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렴. 지금은 그 곳을 떠나 태평양 상공을 맴돌고 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산과 바다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동쪽의 한 작은 어촌에 머물러 있었지. 경치가 참 아름다운 곳이었어.

내가 그 여자아이를 처음 본 곳은 포구를 끼고 있는 읍내의 한 작은 병원이었어. 그 병원은 언제나 짭찌름한 내음이 떠나지 않는 선창가에 있었지. 병을 잘 고친다는 말이 자자하게 퍼지면서 늘 환자들로 북적거렸어. 소문을 듣고 먼 데서 찾아오기도 하였지. 그러다 보니 진료를 받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어.

나는 그날, 기선들이 닻을 내린 항구 주위를 맴돌다가 우연히 그 병원 안으로 들어갔는데, 때가 때인지라 나를 보자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더군.

나는 그때 보았지. 왼쪽 팔에 흰 천을 감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여자 아이를. 물빛 같은 눈동자며 하얀 얼굴은 아픈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어. 이따금 엄마를 보고 방글방글 웃기도 하면서.

나는 아이 곁으로 살며시 다가갔어. 그리고는 두 가닥으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날렸지.

“아이, 추워.”

아이는 내가 달려들자 엄마 품속으로 파고들지 뭐야. 친친 감은 천으로 피가 배어 나와 더 안쓰러워 보였어.

“이한솔 어린이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에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어. 나는 포르말린 냄새가 가득한 대기실을 깨끗하게 헹궈놓았지. 그러고 나니 병원 공기가 한결 맑아지더군.

그런데, 진료실에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나도록 아이는 나올 줄 몰랐어. 나는 궁금해서 진료실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지. 의사 선생님이 아이 엄마를 보고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어.

“확실한 건 검사를 해봐야 하겠습니다만 제 소견으로는 팔뼈에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앞으로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이라도 입원 수속을 하고 몇 가지 검사를 받아보도록 하지요. 검사 결과를 보고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아이는 수술을 해야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눈만 말똥거릴 뿐이었어. 엄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지.

입원 수속을 마친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병실로 올라갔어. 푸르스름한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아이가 엄마한테 묻는 것이었어.

“엄마, 수술이 뭐야?”

“응, 아픈 데를 고쳐주는 거야.”

“아퍼?”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안 아프게 해주실 거야.”

아이가 배정 받은 방은 ‘차르르, 처얼썩~차르르, 처얼썩’ 바닷물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모습이 병실 창으로 내다보이는 5층의 맨 끝 방이었어. 창가에 서면 저 아래로 갈매기, 등대, 수평선, 들고나는 고깃배까지 한눈에 들어왔지. 병원 마당이며 나무 울타리로는 벌써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이고 있었어. 잎새를 다 떨군 나무들의 속삭임도 들을 수 있었고.

침대에 누운 아이는 엄마 손을 잡은 채 잠이 들었는데, 그 평화로움이라니.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 마음까지 호수처럼 잔잔해지지 뭐야. 나는 산봉우리에 벌건 노을이 걸쳐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때까지 아이는 깨어날 줄 몰랐어.

그 뒤로 나는 여기저기를 맴도느라 아이를 볼 수 없었어.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지. 나는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다가 입원실 창가에 서 있는 그 아이를 보고 말았어.

어둠이 들어차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나는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지. 입원실에는 그 아이 말고도 다리를 다친 아저씨 한 분이 더 계셨는데, 표정이 어두워 보였어.

다음 날 아침. 아이는 언제 일어났는지 병실 창가에 서서 엷은 빛살이 퍼져 있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어. 어느 순간, 아이의 얼굴에 찬란한 아침햇살이 고여 들었어. 계속 어두운 표정이다가 햇살을 보자 환하게 웃지 뭐야. 아이의 밝은 모습을 보자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더군.

내가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는 병실이 텅 비어 있었어. 뻐꾹시계 소리만이 가느다랗게 들려왔지. 병원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어.

나는 한동안 세상의 소식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느라 그 아이를 잊고 지냈어.

그런데, 서리가 자욱이 내린 어느 날이었어. 나는 평소처럼 읍내의 상공에 떠 있었지. 아아, 저만큼 바닷가에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는 그 아이가 보이지 뭐야.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나는 얼른 달려갔지. 아이는 파도가 밀려와 모래성을 허물면 다시 쌓고 또 허물면 다시 쌓고 하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지. 뱃고동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더군. 해변은 너무 조용했어. 파도만이 고요함을 걷어갈 뿐이었지.

나는 아이 곁을 더 이상 따라다닐 수 없었어. 차가운 몸으로 자칫 아이에게 감기를 옮길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야.

아이가 사는 집은 성냥갑 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언덕이었어. 집 마당에서면 옥빛 바다며 저 멀리 낙타 등 같은 산이 가뭇하게 바라보였고.

나는 그렇게 아이 곁을 맴돌면서 겨울을 보냈어.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나는 하늘에 있는 엄마의 부름을 받고 말았어. 이제 정든 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더군.

나는 아이한테 작별 인사를 했어.

“꼭 다시 너를 보러 올께.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아이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대답이 없었어. 소꿉놀이에나 열중할 뿐이었지.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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