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인의 아버지는 스웨덴을 이렇게 살았다
입양인의 아버지는 스웨덴을 이렇게 살았다
  • 이석원 기자
  • 승인 2018.07.18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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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스톡홀름서 한식당 운영 강진중 사장
▲ 강진중 사장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남강(Nam Kang)’이라는 한국 식당을 운영하는 강진중 사장(60)에게는 꽤 많은 직함들이 붙는다.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 유럽 한인회 총연합회 부회장, 세계한인무역협회(OKTA) 서유럽 담당 부회장, 재스웨덴 한국 입양인 후원회장….

1993년 ‘남강’을 오픈한 이래 25년 간 스웨덴 사회에 확실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강 사장은 말 그대로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성공한’ 한국인 사업가다.

강 사장은 박경리의 소설 ‘김 약국의 딸들’의 무대이기도 하고, 섬진강을 따라 재첩의 향기가 남다른 경남 하동 사람이다.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다복하다’는 표현은 그의 것이 아니다. 본인의 표현대로 ‘태어난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집안의 도움은 없었다. 고등학생의 몸으로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험한 일을 하며 공부를 했다. 그는 낯선 스웨덴에서보다 더 혹독한 삶을 이미 한국에서 먼저 겪었다.

그의 삶은 서울의 한 특급 호텔 일식당을 거쳐 스웨덴으로 향했다. “스웨덴에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말이 그를 이끌었다. 원래 그는 쿠웨이트나 아랍에미레이트 등 중동에서 일하고 스위스 로잔에 있는 요리 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길이 달라진 것이다. 그렇게 스톡홀름 브롬마 공항에 발을 내디딘 게 1982년 6월이다.

“당시는 스웨덴의 노동 인구가 부족해 이민자들을 환대하는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것은 그것과 상관없는 나의 몫이었죠. 어렵게 학업을 마치는데 10년이 걸렸고, 학업을 마친 후 곧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스톡홀름의 한 일식당에서 일하며 공부를 한 그는 1993년 ‘남강’을 오픈했다. 성공은 1년 만에 그의 손을 잡았다. 24석짜리 작은 식당에는 하루 400명의 손님이 몰렸다. 게다가 1930년 이래 최악으로 추락한 스웨덴 경제가 강 사장에게는 기회였다.

간이식당 수준이던 강 사장의 ‘남강’은 스웨덴에서 가장 큰 규모로 확장됐다. ‘남강’의 성공을 발판으로 주식회사 남강(Nam Kang AB)을 설립한 강 사장은 한국의 한 소주 브랜드의 유럽 유통을 담당하고, 북유럽의 참나무를 한국에 공급한다. 한 해 매출이 800만 달러에 이르렀고, ‘남강’은 매출 규모로는 스웨덴 상위 3%에 드는 식당이 됐다.

“스웨덴에서 사업을 하며 깨달은 게 있습니다. 사람은 두 부류죠. 머리로 도전하는 사람과 몸으로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경험으로 보니 머리로 도전하는 사람이 몸으로 도전하는 사람보다 성공률이 낮더라고요. 머리도 중요하지만, 몸을 움직일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스웨덴 사람이 아니면서 스웨덴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려면 이들보다 스웨덴에서 적게 산 세월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제가 성공한 비결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강진중 사장은 ‘한국 입양인들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강 사장이 스웨덴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어린 한국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한국말을 전혀 못했다. 이민 2세쯤으로 생각한 강 사장은 그 친구에게 호통을 쳤다. ‘아무리 여기서 태어났어도 어떻게 한국말도 몰라?’ 그런데 그는 스웨덴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태어났다. 그가 입양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강 사장은 그 친구에게 미안했다. 그 친구는 ‘한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였으니까.

 

▲ 강진중 사장(왼쪽에서 두번째)과 한인 입양인

 

강 사장에게 아픈 기억이 있다. 경남 하동 찢어지게 가난한 집 10남매 중 아홉 번째로 태어난 그는 입양될 뻔 했다. 부모님은 입 하나라도 덜자고 그를 입양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다. ‘피죽을 끓여먹을지언정 함께 살자’고. 그 어린 입양인을 봤을 때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감정이입이 됐다. 그리고 그것은 동병상련으로 전이됐다.

그냥 스웨덴 시민과 한국 정부가 인정한 ‘외국 국적 재외 동포’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재외동포법(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외동포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재외동포 비자(F-4)를 발급해 준다. 이 비자를 발급받고 한국에 들어오는 재외동포는 한국 내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취업이 보장된다. 보험 가입이나 금융 활동도 가능하다. 한국 시민들과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이 법이 지난 5월 1일부터 바뀌었다. 한국에서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재외동포에게는 병역 의무가 종료되는 연령인 만 40세까지 재외동포 비자를 제한하기로 한 것이다. 즉, 이제는 새롭게 입양인이 돼 스웨덴에 오는 사람은 41세가 되기 전에는 한국에서 재외동포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한국이 해외 입양을 완전히 중단한다면 모를까 앞으로 해외 입양인들이 한국과 더욱 멀어지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강 사장은 이런 변화에 대해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한다.

“현재 스웨덴에 한국인, 또는 재외동포인 한국인이 3100명 쯤 살죠. 그런데 한국에서 태어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웨덴인이 된 한국인이 1만 1000명입니다. 3배가 넘죠. 그래도 이들은 참 잘 살아줬어요. 스웨덴에 오게 된 아픈 과정을 딛고. 스웨덴 내에서 한국 입양인으로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그들 중 어머니의 나라를 찾아서 한국에서 샹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요. 하지만 앞으로는 그것도 힘든 일이 됐으니….”

1994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강 사장의 입양인 후원 활동은 스웨덴 한인입양인 후원회 설립에 이어 유럽 한인 입양 청년 체육회로 확대된다. 강 사장은 입양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았고, 이들은 사비를 털어 거의 매년 유럽 각국을 돌며 입양인과 현지 한인들이 어우러지는 체육과 문화 행사를 연다.

“스웨덴의 한국 입양인들은 소중한 한국의 재원입니다. 그들의 상당수는 스웨덴 사회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사회의 유의미한 구성원으로 자랐습니다. 그 어떤 외교관보다도 한국과 스웨덴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한국의 국가적 이익을 위해서도 이들을 재외동포로 인정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강진중 사장은 앞으로도 한국과 스웨덴을 오가는 사업가로 활동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가장 희망하는 것은,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신의 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스웨덴인이 돼버린 입양인들도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스웨덴=이석원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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