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국영화사 훑어보기 - 마지막회 <시>

영화소개 : <시>, 2010년작, 감독 이창동, 출연 윤정희, 이다윗, 김희라, 안내상 등

▲ 영화 <시> 포스터

“현재 한국영화에서 테크놀로지는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태극기 휘날리며>(2004)에서 절정에 달한 ‘웰메이드(well-made)’ 경향은, 이 땅에서 영화제작이 시작된 이래 자본과 기술의 부족을 원죄처럼 지닌 채 애써 외면해야 했고 심지어 억압해야 했던 ‘기술적 완성도’에 대한 열망을 한풀이라도 하는 것 같다. 이른바 ‘비 내리는’ 화면과 ‘입 따로 소리 따로’였던 사운드의 열악함에서 탈피한 것이 불과 1990년대 중반이었음을 상기한다면, ‘할리우드 못지 않다’는 찬사가 환기하는 정조는 사뭇 감회에 젖게 만들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한국영화는 이제야 ‘근대화’를 달성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영화에서 테크놀로지는, 단순히 현실효과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이 아니라 내용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최근 한국영화의 트라우마 상태 : 테크놀로지와 원한』 중에서, 백문임

현대 한국영화의 가장 큰 과제는 테크놀로지였다고 할 수 있다. 할리우드에 비해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테크놀로지가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위 논문이 언급하는 것처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던 작품들이 현대에 들어서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2000년대 영화들뿐만 아니라 2017-2018년도에 개봉되고 있는 한국영화들을 살펴봐도 테크놀로지의 과제는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한국영화 대다수가 할리우드에서 다루는 플롯, 스타일, 기법 등을 소화시키는 것에 급급하고 그러다 보니 누아르, 액션 장르만이 강력한 티켓 파워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세태 속에서 테크놀로지가 한국영화계를 잠식했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논문이 지적하는 바처럼 테크놀로지는 형식이나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내용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현대 한국영화의 전부가 테크놀로지라고 하기는 어렵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본과 기술은 여전히 한국영화가 할리우드를 따라갈 수 없고, 그렇기에 테크놀로지로만 승부를 본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가 영화의 내용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현대 한국영화 감독들 또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현대에 들어서서 한국영화는 테크놀로지의 잠식과 동시에 실험기에 들어간다. 다양한 실험영화들이 탄생하고 영화의 형식과 내용은 그 실험 가운데에서 각기 다른 무게를 두었다. 형식이 극대화된 테크놀로지 의존적 영화들이 박스오피스를 차지하고 나섰다면, 동시에 형식을 붕괴시키고 내용의 참신성으로 영화제에서 승부를 보는 영화들도 등장하게 된 것이다. 아래의 인용은 그런 현대 한국영화의 특징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초국가적 관객이 우리 영화를 인식하는 지역 코드이다. 한국성은 원산지를 알리는 문화상품의 기표이며 지역성을 내세운 판매전략이다. 현대 한국영화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주자들인 박찬욱, 김기덕, 홍상수, 강우석, 강제규, 임상수, 이재용, 김지운, 봉준호 등의 감독과 그 뒤로 포진한 민주화 후기 세대의 감독들은 이러한 상술을 체득하고 성공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재현하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가려진 일상은 초국가적 소통의 주제이다. 386세대임을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 정서와 역사적 감수성, 그리고 그 386세대가 보이는 정치적 지향성마저 훌쩍 뛰어넘는 민주화 후기 세대 감독들의 반항적 상상력은 새로운 한국영화 만들기에 도전한다. 혁명의 필연성은 더 이상 표현의 자유를 유보시키는 문화적 획일성을 변호하지 않는다. 이들의 자유로움이 한국영화의 저항성과 비전형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 『한국영화의 초국가성과 정체성의 정치학 : <춘향뎐>과 <오아시스>』 중에서, 이향진

한국영화사에서 물려 내려오던 한국성을 현대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민주화 후기 세대 감독들이 형성한 자유로운 분위기와 그 영화들은 기존의 전통적 한국성과는 다른 새로운 한국성을 만들어 냈다. 저항적이고 비전형적인 플롯이 현대의 한국사회를 더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고 이렇게 드러나는 새로운 한국성은 한국을 뛰어넘어 초국가적인 코드로서 영화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민주화 후기 세대 감독들은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사회와 개인을 주목하는 비극을 넘어서서 한국성이 짙게 배여 있는 개개인이 분열하는 비극으로까지 발달하게 된다. 이창동 감독도 민주화 후기 세대 감독에 포함되며 영화 <시>를 포함한 그가 감독한 여러 작품들도 이런 현대적 한국성의 코드에 부합하고 있다.

영화 <시>는 한국사회에서 현대에 들어 가장 문제로서 떠오르고 있는 주제들을 한가운데에 담았다. 이혼가정과 조손가정, 가난, 성폭력, (노인) 성매매, 청소년 폭력과 자살, 학부모와 학교의 부정의 등등 너무나 복합적이고 수많은 사회 문제들을 제시한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의 한국성을 드러낸다. 더 이상 사회와 단체에 부딪히거나 사회 대 개인 구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수많은 사회 문제를 내면에 품으면서 스스로 분열하는 형태로 나아간다. 그것이 현대의 한국적인 인간형이 되었으며 결국 새로운 한국성이란 한국 사회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삶을 살아가는 개인의 인간성과 비인간성 구도에 존재하는 것이다. <시>에서 주인공 미자를 보라. 자신이 감당하기 너무나도 힘든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면서도 미자는 겉으로 오히려 화려한 옷차림을 하며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미자가 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시를 잘 쓰는 법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은 점점 미자의 삶이 갖는 포커스가 사회는커녕 오히려 자아의 내면에 맞춰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시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미자라는 캐릭터의 분열은 이미 예고되어 있던 것과 같다. 이창동 감독의 이러한 관점과 연출은 <시>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아래의 인용을 더 살펴보자.

“이창동이 쓰는 현대 한국사회 영상일지는 민족의 문화적 전통으로 꾸며진 ‘한국성’의 작위성을 거부한다.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로 이어지는 이창동의 현대 한국 얼번(urban) 드라마 삼부작은 근대화과정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파괴적 삶을 겪는 하층민들의 이야기이다. <초록 물고기>와 <박하사탕>의 한국사회는 기억하고픈 유년의 과거마저 부정하는 현실일 뿐 출구가 없다.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돌아가고 싶은’ 충동만을 소리치게 할 뿐, 정치적 폭력에 힘없이 쓰러지는 개인의 자멸을 방치하는 사회가 바로 그가 그리는 개발국가 한국의 모습인 것이다. 기억의 중심부에는 가족이 있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기억도 처연한 상실의 현실이다. 순수함을 잃은 도시공간은 약자, 소수자를 보호하는 사회적 장치가 전혀 없는 사회이며 전통적인 가족관계만을 해체시킨 근대화과정은 비인간적일 뿐이다.” - 『한국영화의 초국가성과 정체성의 정치학 : <춘향뎐>과 <오아시스>』 중에서, 이향진

 

▲ 영화 <시> 스틸컷

 

이창동 감독은 전통적 한국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논문에서 말하듯이 그는 한국 사회가 개발국가로서 지니는 사회적 문제들을 전혀 가볍게 다루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문제들이 그의 영화 전부를 보여주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도 아니다. 그러한 문제들도 한국 사회의 측면을 잘 드러내고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현실에 ‘힘없이 쓰러지는 개인의 자멸’이다. 이창동의 얼번 드라마 삼부작은 꾸준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캐릭터의 분열성을 이야기해왔고, 영화 <시>는 그 연장선상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시>의 주인공 미자는 스스로 자멸, 분열을 거듭하면서도 동시에 용서와 공감이라는 인간성에 대한 끈을 ‘시’라는 이상적인 메시지를 통해 놓지 않는다. 어쩌면 그 참혹한 사회 현실과 개인의 자멸이라는 고리를 끊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그러기엔 인간성이 가지는 힘이 너무나도 나약하다.

결국 현대 한국영화는 근대화, 민주화시기를 겪으며 드러났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극복했다기보다는 개인의 범주로 그 문제들을 끌고 들어감으로써 더 복잡하게 심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창동이나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와 같은 감독들의 영화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지만 작품성 있다, 라는 설명으로 마무리되고 대중은 여전히 테크놀로지 잠식적 영화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문제의식은 결코 언제까지나 무시될 수만은 없다. 현대에 들어서 영화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고민은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새롭게 드러나는 문제의식들을 감독들은 어떤 형식을 기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현대가 갖는 가장 큰 특성이 문제의식이 갖는 생동성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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