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이어진 ‘험난한 여정’

끝이 보이지 않던 길고긴 전쟁의 끝이 보이고 있다. ‘공룡 삼성’에 맞서 하루하루 힘겨운 시절을 보냈던 유족들과 반올림의 여정도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적지 않은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거나 투병 중이었다. ‘삼성 직업병’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는 황유미씨가 숨진 뒤인 2007년 11월20일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 및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의 신호탄이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관련 길고긴 여정을 살펴봤다.

 

 

삼성반도체의 백혈병 문제가 제기된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유족들과 관계자들의 노력이 계속돼 왔지만 해결되기까지는 험난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근로복지공단은 2009년 5월 유미씨를 포함한 5명의 산재 신청 사건을 불승인했고 결국 사건은 법정으로 갔다. 법원의 판결은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행정법원은 2011년 6월 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등 유가족 3명과 투병 중인 직원 2명이 낸 이 소송에서 유미씨 등 2명에 대해 산재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 판결은 2014년 8월 서울고법에서 확정됐다. 유미씨가 숨진 지 7년이 지나서야 이뤄진 일이었다.

삼성전자도 이 때부터 산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2014년 11월 반올림, 가족대책위는 ‘삼성전자 사업장의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를 구성해 문제 해결을 논의했고 김지형 전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았다.

조정위는 8개월에 걸친 논의 끝에 2015년 7월 조정권고안을 제시했다. 삼성전자가 1천억원 규모의 독립된 공익법인을 세워 피해자 보상과 재발 방지 역할을 하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같은 해 9월 이 조정안을 거부했고, 자체 보상위원회를 꾸려 피해자들에게 개별 보상하기로 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독립 법인’이 백혈병 등 직업병 피해를 접수하고, 각 사업장 등을 감시하는 권한을 가지는 걸 부담으로 여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자 반올림은 2015년 10월부터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1천일 넘게 농성을 이어왔고 7월 25일 마침내 깃발을 내렸다.

 

사실상 ‘강제중재안’

한동안 쉬었던 조정위가 다시 나선 것은 최근이었다. 조정위는 지난 18일 제2차 조정을 시작한다며 삼성전자와 반올림 쪽에 공개 공문을 보냈다.

조정위는 양쪽에서 세부 합의안에 대한 의견을 받아 이를 조율하는 과거 방식이 아닌, 조정위원장이 ‘중재안’을 내는 방안을 제시했다. 조정위가 양쪽 의견을 종합해 사실상 강제중재안을 내겠다는 얘기였다.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이런 조정위의 중재안에 동의했다. 조정위와 삼성전자, 반올림은 24일 이런 중재 방식에 합의하는 서명을 했다. 조정위는 10월 초까지 최종 중재안을 내놓을 예정이며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이 중재안에 합의할 계획이다.

중재안의 큰 틀은 새로운 질병보상 방안, 반올림 피해자 보상, 삼성전자의 사과, 반올림 농성 해제, 재발 방지 및 사회공헌 등이 담길 것으로 전해진다. 중재안의 세부적인 내용을 정하고 조율하는 절차 정도가 남았다는게 관계자의 말이다.

2007년 삼성 반도체 생산라인 직원이었던 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이후 10년 넘게 이어온 '반도체 직업병' 논란은 마침내 이렇게 종지부를 찍을 전망이다.

조정위는 ‘2차 조정을 위한 공개 제안서’를 양측에 발송했고 삼성전자는 “무조건 수용한다”고 했고, 반올림 역시 “제안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재발방지’와 ‘사회공헌’

반올림은 지난 2015년 7월 조정위 권고안 무산 이후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기약없는 천막농성을 해왔다. 삼성전자는 자체보상안을 만들고 이에 합의한 피해자에 개별보상을 시작했지만 반올림과 일부 피해자들은 '밀실 보상'이라고 반발했다.

조정위의 이번 중재안 제안은 사실상의 최후 통첩이었던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반올림과 유족들의 오랜 숙원들도 일부 숙제가 풀릴 전망이다. 새로운 질병보상 방안과 이에 따른 보상 실시방안 마련, 반올림에 속한 삼성전자 건강 피해자에 대한 보상안 마련, 삼성전자 측의 사과, 재발방지와 사회공헌 등의 내용들은 다른 일부 사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은 석방 이후 삼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고민하다 이 난제를 풀기로 결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정위에 따르면 양측의 합의가 이뤄질 경우 오는 10월까지 반올림 피해자 보상을 모두 완료하게 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앞으로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강력한 해결의지를 밝혔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압도적인 산재사망률 1위 국가"라고 주장하며 ”선진국에서 후진적인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도 “회사가 노동자의 안전에 조금이라도 신경썼다면, 원청이 하청업체의 안전관리에 신경썼다면, 정부가 처벌만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죽지 않았을 목숨들"이라며 "산재사망은 산재 살인과 같다"고 주장한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와 관련 “의학적으로 최종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원칙적 입장에서 탈피해 대승적으로 합의해 준 삼성전자와 반올림에 감사드린다"며 ”10년 이상 이어져온 반도체 백혈병 분쟁이 중재와 조정을 통해 사회적 합의에 이르게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이어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분쟁이 해결의 돌파구를 찾았고, KTX 해고 승무원들이 정규직으로 일자리에 복귀하는 등 우리 사회가 10년 넘게 안고 있던 숙제가 풀리고 있다"며 "해묵은 갈등을 분쟁의 당사자들이 사회적 합의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설명했다.

2007년 유미 씨의 백혈병 사망이 계기가 된 '10년 분쟁'이 한국 사회의 산업재해 문제에 어떤 이정표를 세울지 귀추가 주목된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