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망할 트레킹 같으니라고, 제기랄!”
“이런 망할 트레킹 같으니라고, 제기랄!”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8.07.26 2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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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열두 번째 이야기 / 강진수

23.

중턱까지 올랐을까. 숨이 턱턱 막혀오고 나와 에이미는 등산막대에 몸을 맡기며 말없이 걷고 있었다. 한참 애써서 올라가는 도중에 형을 태운 말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 형이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걱정했지만, 우리는 걱정 말라고 정상에서 먼저 가 기다리고 있으라고 안심시켜주었다. 물론 안심시켜줄만한 상황은 전혀 아니었지만 말이다. 산은 점점 가팔라졌고 길은 험난해졌다. 보통의 등산로처럼 계단이 놓여 있거나 돌길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말 그대로 자연의 길 그 자체였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작은 호수와 풀숲, 라마들이 뛰어노는 들판이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곳곳에 진흙투성이에 늪지대를 건너는 것 또한 당연지사였다. 그러다보니 신발은 금방 너덜너덜해졌고 두 다리 역시 아파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 다리나 신발이 아니었다. 제일 힘든 것은 헐떡거리는 호흡이다. 해발고도가 조금 낮은 곳에서는 걷는 데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지만 고도가 올라갈수록 호흡은 가빠지고 두통이 심하게 온다. 두 다리는 이미 더 이상 걷지 못할 정도로 덜덜 떨리게 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고산병은 4000미터가 넘는 이 지역에서 트레킹을 하기 위해 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하며 큰 장애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나와 에이미도 정상을 향해 갈수록 괴로워했다. 긴 시간 동안 험난한 길을 걸어오느라 체력도 완전히 방전된 마당에 남은 오르막을 모두 오르기에는 고산병이 계속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숨이 계속 헐떡거리고 잘 내쉬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산을 계속 오른다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결국 에이미도 말을 부르게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말몰이꾼이 말을 대령했고 에이미는 그와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까 똑같이 고산병으로 괴로워하던 형에게는 단 한 푼의 흥정도 응하지 않던 말몰이꾼이 에이미의 흥정을 받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정말 강인하고 생존력이 강한 모습이었다. 고산병이라는 고통에 말을 타려하면서도 어떻게든 말 값을 깎아보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은 진정한 여행자의 모습인 것만 같았다. 나와 형도 이전에 저렇게 흥정을 했었어야 했나. 돈 한 푼 한 푼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너무 쉽게 비싼 말 값 전부를 건네주고 말았나, 이런 후회가 뒤섞인 감정으로 에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길고 긴 흥정 끝에 에이미가 말에 올랐을 때 나는 조금 섭섭한 감정을 느꼈다. 형도 말을 타고 떠나가고, 에이미마저 말을 타고 떠나가 버리면 내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말이 너무 타고 싶고 계속되는 산행에 이미 지쳐버렸지만, 자금 전부를 아까 형이 가지고 말에 올라 먼저 정상으로 갔기에 나에게는 말을 부를만한 돈 역시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에이미에게 빌리기엔, 에이미가 정말 열심히 흥정하는 모습을 보니 그럴 마음이 절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에이미는 내게 말을 타라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 나는 괜히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니 걱정 말라는 표정과 말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결국 에이미를 태운 말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고 내 손에는 등산막대만이 남아 있었다.

 

 

두 손에 쥔 등산막대를 꼭 움켜쥐었다. 이것에라도 의존하면서 어떻게든 정상에 올라야만 한다. 무지갯빛이 영롱하다는 비니쿤카를 보러 가기가 이처럼 고되구나, 계속 입 안에 되새기면서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웬만한 사람들은 거의 말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고 나처럼 말을 타지 않으며 자력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였다. 마의 오르막 코스에서 나와 같이 등산막대를 땅에 힘껏 내리꽂으며 올라가는 나름의 동지들을 보며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그들과 나는 멋쩍은 웃음으로 인사하며 등반을 함께 했다. 쉴 때도 같이 쉬고, 앉아서 서로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물어보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다시 기력을 채우면 어김없이 일어나 죽을 힘을 다해 정상으로 올랐다. 정상이 보인다. 오르막은 나의 인내력을 시험하듯 점점 더 가팔라졌지만 이미 두 눈으로 정상을 뚜렷이 바라보며 산을 오르고 있다. 이젠 저 정상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온몸으로 상상하며 산을 오를 뿐이다.

 

24.

드디어 고대하던 정상 바로 직전의 땅을 밟는 순간, 나를 기다리는 형과 에이미의 얼굴이 보였다. 둘이 먼저 정상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나와 함께 정상의 모습을 보겠다며 그 바로 밑에서 나를 기다려 준 것이다. 멀리서 손을 흔드는 형의 모습을 보니 슬쩍 눈물이 났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슥 소매로 훔치고선 얼른 형과 에이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형이 내 손을 잡아 끌어주며 다른 손으로는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고생했다.” 별로 긴 말도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들은 짧은 그 한 마디가 얼마나 기억에 남는지 모른다.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등산막대를 땅에 패대기 쳐버렸다. 그러자 형과 에이미가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며 어서 막대를 들고 올라가자고 한다. 형에게 고산병 증세는 좀 어떠냐고 물었더니 오래 쉬어서 이젠 괜찮아졌다고 한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 셋은 정상을 향해 다시 뭉쳐 걸었다.

 

 

전망대로 가는 바로 입구에 잉카식 돌무덤이 쌓여 있는데, 드디어 정상을 올랐다는 성취감에 기쁜 수많은 트레커들이 그곳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와 에이미도 커다란 바위를 골라잡아 대충 앉았다. 그곳에서 무슨 근사한 이야기를 하겠는가. 우리는 숨을 조금 고르자마자 서로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곤 영어로 시원하게 욕설을 서로 내뱉었다. 체력도 완전 바닥난 상황에 정상을 코앞에 두었지만 그 성취감에 사로잡히기보단 투박하고 진심어린 욕설들을 내뱉으며 웃음을 나누는 것이었다. 좀 순화시켜서 번역하자면 이렇다. “이 망할 트레킹 같으니라고! 제기랄! 내가 다시는 이런 걸 하나봐라!” 등산막대를 돌 표면에 딱딱 부딪치면서 분노 섞인 목소리로 한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고되었던 나의 몸과 지나온 길들이 모두 사르르 풀려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마주한 비니쿤카는 뭐라 설명하기 너무 어려울 것 같다. 사진으로도 그 압도적인 위용을 느끼기란 힘들 것이다. 무지갯빛으로 영롱히 빛나는 능선은 물론 아름다웠지만,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선 거대한 자연의 위대한 섭리로서 비니쿤카는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찬란함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란 더 많겠지만, 굳이 덧붙이지 않으려 한다. 무엇보다 비니쿤카가 그토록 멋지고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장장 6시간에 걸쳐 오른 수 킬로미터의 길 때문이었을 테다. 말을 타고 온 형이나 에이미, 또는 다른 관광객들보다도 내가 느끼는 희열과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기에 그렇다. 이렇게 또 하나의 보물을, 수많은 고통을 바탕으로, 여행의 한 가운데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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