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선언

국민연금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재계의 갑질 사건 등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하면서 후폭풍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국민연금기금운영위원회는 최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을 의결했다. 운용위 측은 관심을 모은 국민연금의 ‘기업경영 참여’와 관련 제한적으로 허용하기로 했다. 기금운용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기업경영 참여를 원칙적으로 배제했지만, 기금운용위원회에서 특별히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에 대해서는 경영참여를 할 수 있도록 했다”며 “다만 기업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이례적인 상황에만 행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이번 결정이 재계에 남길 영향력과 파장을 살펴봤다.

 

 

조심스럽지만 한편으로는 파격적인 행보를 담고 있다.

국민연금이 기업경영 참여를 일부 허용한 것은 지난 정부안을 다소 수정한 것으로, 물의를 일으킨 기업을 견제하는 ‘스튜어드십 코드’ 취지를 제대로 살려야 한다는 노동단체 등의 주장을 반영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건복지부는 당초 발표한 초안에서 “경영 참여에 해당하지 않은 주주권 행사부터 시작하고, 경영 참여는 나중에 검토해 결정하자”는 의견을 낸 바 있다. 이에 대해 진보 성향 시민단체들은 “알맹이를 빼놓은 것으로, 기업을 견제하는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이 자산운용사들에게 의결권을 일부 위임하는 안은 당초 반대가 많았으나, 제한적으로 허용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은 “자산운용사들은 잠재적 고객인 대기업들의 눈치를 보기 쉬운데, 이들에게 국민연금의 의결권을 위임하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될 수 있다”고 비판한바 있다.

운용위 측은 “의결권 행사를 위임할 때는 이해상충 문제를 감안해 가이드라인을 수립할 것”이라며 “위탁운용사의 의결권 행사가 국민연금 수익 제고에 반할 경우 의결권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가이드라인 수립”

운용위는 이외에도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위탁운용사 가점 부여,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운영방식, 의결권행사 사전공시 등도 논의를 거쳐 원안을 소폭 고치는 선에서 합의했다.

스튜어드십코드란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가 자금주인인 국민의 이익을 위해, 주주활동 등 수탁자책임을 충실하게 이행토록 하는 행동지침을 의미한다. 스튜어드십코드는 준비 기간이 필요해 실제 적용되는 것은 내년 하반기 이후가 될 것이라는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국민연금이 이 같은 결정을 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선을 넘어야 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 “경영참여 주주권은 제반여건이 구비된 후 이행방안을 마련하되 그 전이라도 기금운용위원회가 의결한 경우에는 시행할 수 있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미국, 영국, 호주, 일본 등 지난해까지 20개국이 도입한 국제적인 지침으로 자본시장법상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 범위가 최대 관심사였다.

당초 초안에선 '경영참여에 해당하지 않는 주주권 행사까지 도입'하는 제1안과 '경영참여에 해당하는 주주권 행사까지 도입'하는 제2안을 제시하며 '경영참여 주주권행사는 제반여건이 구비된 후 재검토'하도록 했다.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과 장기수익 제고 차원에서 필요하지만 경영계 등의 경영간섭 우려를 고려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일부 위원들이 ‘경영참여’ 포함을 요구하면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기금운용위원회가 의결한 경우’라는 조건을 달고 최종안에 들어갔다.

자본시장법 시행령 제154조를 보면 경영참여에 해당하는 주주권으로는 임원의 선임·해임 또는 직무 정지, 정관 변경, 자본금 변경, 배당 결정, 합병·분할·분할합병, 포괄적 주식 교환·이전, 영업 양수·양도, 자산 처분, 회사 해산 등이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 4월 기준으로 635조원의 큰 손이다. 이번 결정을 통해 기업 개선 등 주주권 행사에서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민연금은 10%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이 106곳에 달하지만 몸집에 비해 힘이 약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기업가치와 주주가치를 훼손한 경영진에게 개선은 요구할 수 있지만 이를 따르지 않아도 주주제안 등 실효적인 조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총수 일가의 갑질 논란과 밀수 혐의에 휩싸인 대한항공에 대해서도 지난달 공개서한을 발송해 사실관계 확인과 해결방안을 요구했지만 형식적인 답변만 받았다. 비공개 서한을 보냈을 땐 답변조차 듣지 못해 체면을 구겼다.

재계에선 국민연금의 선택과 관련 경영간섭과 수익률 악화 우려를 어떻게 해소하느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경영계는 "경영간섭과 함께 국민연금이 단순투자자에서 경영참여자로 전환할 경우 투자 전략이 노출돼 단기매매차익을 돌려줘야 하는 부분이 생겨 수익률이 저하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박 장관은 이에 대해 “기금운용위원회의 가장 큰 목적은 기금의 수익성"이라며 "수익성을 배제하거나 저해되는 방향으로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를 결정하는 건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수익률 제고’ 목적

이와 함께 국민연금은 정치권과 재계 등의 입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적인 의사결정 과정도 마련할 방침이다. 독립성을 강화해 힘을 키우겠다는 얘기다.

스튜어드십 코드 활동은 기금운용위원회가 정한 기준·방법·절차에 따라 기금운용본부가 이행하되 주주권·의결권 행사와 책임투자 관련 주요사항 검토 및 결정은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에 맡기기로 했다.

전문위원회는 정부 인사를 배제하고 각계 대표 추천 전문가로 구성되며 주주권 행사 분과 9명, 책임투자 분과 5명 등 14명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5%룰과 10%룰은 법 개정을 통해 완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현행법상 상장사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기관투자자가 경영참여를 하면 지분 1% 이상 변동땐 영업일 5일이내 이를 공시해야 한다. 10% 이상일 땐 매수(매도) 후 6개월 이내에 매도(매수)해 얻은 이익(단기매매차익)은 기업에 반환해야 한다. 이는 국민연금 수익률과 관련된 문제다.

박 장관은 “그 조항 때문에 우리가 경영권 참여형 주주권행사를 자제하겠다고 원칙을 세운 것"이라며 "임원을 선발하는 등 적극 참여했을때도 6개월 이내 수익금 반환하는 걸 없앤다든지 조건이 갖춰지면 경영참여에 적극적으로 하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첫 발을 떼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만만치 않다. 시민사회단체들은 “기업 견제를 위한 실질적 수단은 확보했지만 정부의 실행 의지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는 입장이다.

반면 경영계는 “투자기업 수익률 제고라는 본래 목적보다 기업들의 경영활동을 정부의 정책 방향에 맞추려고 유도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금까지 얘기된 대로라면 대한한공의 ‘갑질 사건’ 등 기업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주주가치 훼손이 극심하다고 판단되는 사안이 발생하면 당장이라도 기금운용위의 의결을 거쳐 이사 해임 등을 할 수 있다.

이는 국민연금을 관리 감독하는 보건복지부가 마련한 스튜어드십 코드 원안에는 없던 내용으로 보다 실효성 있는 주주권 행사 방안이 필요하다는 시민사회와 근로자 위원들의 의견을 수용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결국 스튜어드십 코드가 부작용 없이 안착하기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독립성 확보라고 지적한다. 복지부는 정부 인사를 배제하고 민간위원으로 구성한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사용자와 근로자 단체 등의 추천을 받아 위촉하는 형태는 기존과 다르지 않은 만큼 곳곳에서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

국민연금의 운영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이번 ‘스튜어드십 코드’가 재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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