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 6회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사진=pixabay.com

 

슬픔이 없는 단 한 순간만이라도 상상해보자. 그것은 심각한 역설이다. 가능할 것 같지만 결코 가능하지 않다. 슬픔이 없는 순간은 멈춰버린 시간, 잃어버린 생과 같다. 현대인으로 갈음되는 요즘 사람들의 삶은 늘 슬픔 속에 잠겨 있다. 그것이 사회적 슬픔이든, 개인적이고 사적인 슬픔이든, 또는 애인이나 친구, 가족과 같은 타인의 슬픔이든, 여러모로 슬픔이란 것이 없으면 요즘을 사는 것 같지 않게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라는 제목은 사뭇 비장하다. 반드시 슬픔이 없게끔 만들겠다는 어떤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비현실적인 순간의 길이가 오직 십오 초라는 점에서도, 결국 눈 깜짝할 새에 불과한 하나의 판타지라는 점에서도, 슬픔이라는 단어가 갖는 여지가 얼마나 긴 것인 지를 우리는 눈치 챌 수 있다.

모든 것이 침전되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왜곡된다. 평범하게 보이는 일상들이 왜곡되는 순간에서 우리는 슬픔이 없는 십오 초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난해하게 느껴지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천천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그런 순간들을 마주하면서 살아간다. 글자를 읽다가도 글자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지나가는 행인이 가짜처럼 느껴지고 한밤중에 들어오는 가로등 불이 거짓처럼 여겨지는 순간들. 고양이가 꽃잎을 뜯어먹거나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는 순간 역시도 모두 일종의 판타지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정신병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면밀한 관찰로 인해 세계가 나로 하여금 멀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이 그 모든 왜곡들이 평범한 나의 일상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기억하라. 심보선은 그런 판타지 같은 일상을 차분하게 그려내는 힘을 가진 시인이다.

순간순간들이 고요하고 평화로운데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왜 이루 말할 수 없게 묵직한 건더기가 가라앉아 있을까. 그 지점을 건드리는 심보선의 힘은 어떻게 보면 블랙 유머로써 시상들을 전개해나가는 시인의 성향에서 비롯된다. 무겁고 복잡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시선들을 천천히 옮겨간다. 수많은 모순점들은 그에게 오직 유머러스한 원천에 불과하다. 이토록 자조적인 웃음들은 슬픔의 영역이 아닌 유머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일상에게서 자조를 찾는, 시인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론은 슬픔의 시대에서 슬픔을 결연히 삭제한다. 혹은 슬픔을 죽여 버린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슬픔을 어떤 무서운 힘으로 시대로부터 떨어뜨려 놓지만 전혀 억지를 부리고 있지는 않다. 자연스러운 웃음에서 심보선의 힘은 자연스러움을 되찾는다. 그래서 시를 읽는 내내 편안할 수 있고, 시인의 시선이 꼭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것과 동일함을 느끼게 함으로써 시는 다시 일상의 영역에 머문다.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들뿐이라면, 벤치에 덩그러니 앉아 사람 구경을 하는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사람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옷차림, 지친 표정, 즐거운 미소, 시답잖은 대화, 사람간의 관계와 만남 등. 그러나 심보선의 시는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물어보지 않는다.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은 무의미하고 광범위하다. 반면에 시인이 집중하는 외부 세계의 표면을 보라. 우리는 표면이 아닌 그 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치부하지만 실은 내부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내부를 알 수 없는 것일 테다. 그렇기에 외부를 무시한다는 것은 너무 건방진 태도다. 오로지 표면만을 그려내는 문장으로부터 얼마나 더 많은 세계가 열릴 수 있는지 위의 시로부터 알 수 있다. 그리고 감정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온전히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표면 위에 차곡차곡 쌓인 무언가와 같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를 읽자는 것이다. 책임질 수 없는 단어들만을 여태 나열했지만 글은 글이고, 시를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사라지는 길 위에 있는 일상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과연 웃어넘길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는 것이 용기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가벼운 시선으로 시를 건드리기 위해서는, 결코 세상을 복잡하게 살지 않으려는 대단한 용기를 부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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