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김경집 칼럼

지난 선거에서 세 곳을 제외하곤 모두 이른바 진보교육감이 당선되었다. 지지난 선거에서도 뜻밖에 진보교육감의 당선이 우세였다. 지방선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광역단체장, 지자체장, 광역시도의회 의원, 시군의원과 더불어 교육감 선거까지 한꺼번에 뽑는 까닭에 누가 누군지 제대로 알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정책에 대해서는 거의 깜깜이 선거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교육감 선거의 경우는 정당에 속할 수 없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알기 어렵다. 게다가 교육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높은 사회지만 정작 내 아이가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무관심하기 일쑤이기 때문에 관심이 낮을 것이라는 게 통념이었다. 그래서 1번 기호만 받으면 무조건 당선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판이었다.

 

▲ 사진출처=pixabay.com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뜻밖에도 진보교육감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그건 무슨 까닭이었을까? 학부모가 아닌 유권자들이 더 많은데 과연 교육감 후보들의 면면을 꼼꼼하게 살펴는 보았을까? 도대체 어째서 진보적인 후보를 대거 뽑았을까? 이미 그때부터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교육으로는 미래를 살아갈 수 없다는 기본적이고 비판적인 인식이 널리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내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 학부모가 아니더라도 이 나라 시민이면 누구나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수적 성향의 교육자들에게 이 나라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절박감의 표출이었다.

 

정말 그들은 진보적인 교육감인가?

‘묻지마 투표’의 문제를 인식한 선거 당국은 지난 선거에서 교육감 후보들의 경우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번호를 돌려서 투표했다. 이른바 ‘1번 효과’를 상쇄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지지난 선거보다 더 많은 진보교육감의 선출이었다.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 현재의 교육 체제에 대해서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엄중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과연 ‘이른바 진보교육감’들이 정말 진보적인지 묻고 싶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교육감 후보도 ‘18세 유권자에게 선거권을 주라’는 공약을 내건 사람을 보지 못했다. 정치꾼들이 각 당의 성향과 잇속에 따라 선거 직전에 18세 청소년 선거권을 두고 다툼을 거듭할 뿐 정작 선거가 끝난 후는 그 문제에 대해 무관심의 반복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 문제는 그저 대답 없는 공허한 메아리고 헛바퀴 도는 것이라는 인식일 널리 깔렸다. 하지만 교육계의 경우는 다르다. 그 해당 당사자들이 바로 학교에서 교육 받는 18세 청소년들이 아닌가!

이 문제는 엄연한 교육계의 1차적 문제다. 당연히 발언해야 한다. 아무리 교육계가 보수적이고 겁이 많으며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칠 만큼 몸을 사린다고 하지만 이건 그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의 정당한 권리의 문제다. 그들의 권리에 대한 1차적 발언의 의무는 당연히 교육계의 몫이다. 적어도 다음 둘 중 하나의 발언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학교에서 민주주의, 정의, 자유와 평등, 인권, 책임 등에 대해 제대로 가르쳤다. 따라서 18세면 충분히 객관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왜 그들의 선택을 의심하는가. 이미 그 나이면 납세와 국방 등의 의무가 부과되는데 의무만 있고 권리는 제한하는 것은 위헌적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경우 거의 모두 선거권을 주고 있다. 우리는 제대로 민주 시민으로서 가르치고 키웠으며 그들의 능력과 선택을 보증할 수 있다.”

이렇게 발언하거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의 교육 체제에서는 18세 청소년들이 스스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게 자라지 못한다. 우리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따라서 아직은 그들에게 중요한 국가적 선택의 권리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라고 발언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발언’이 아니다. ‘인간의 권리’에 관한 발언이다. 그러나 그 어떤 교육자도 이 문제를 정식으로 발언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한다. 전교조나 소속 교사들도 이렇게 발언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워할 정도다. 정치 개입 발언으로 몰아가는 그릇된 분위기 탓이다.

과연 지난 선거에서 진보교육감을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 청소년 유권자에게 투표권을 주도록 하겠다는 공약을 당당하게 내세운 사람이 있는가? 그런 발언으로 혹여 보수적 유권자가 이탈할까 두려워 말을 아꼈을 것이다. 그 심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적어도 진보적 교육감 후보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당당하게 발언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 우리네 교육감들이 진보 일색이라는 평가에 대해 부정적이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말하면서 늘 ‘백년하청’이었다. 그러면서도 버틴 건 지난 세기 산업화 시대 발전의 원동력이 ‘질 좋은 노동력’이었고 그것을 교육이 담당했다는 인식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교육계도 많은 변화와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점진적 개선’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은 혁명의 시대다. 당연히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보수적이고 변화가 더딘 곳이 교육계다. 교육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나름대로 많은 변화를 수행하고 있다고 자평한다. 과거에 비해서 수행해야 할 연수와 교육의 양이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과거와 비교했을 때’ 그럴 뿐이다. 지금의 교육이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미래의 희망은 없다. 그런 절박감이 필요하다.

 

▲ 사진출처=pixabay.com

교복은 누가 입는가?

나는 학생들의 교복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교복을 찬성하는 이들도 많다. 이유도 나름 근거가 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더 넓게 바라봐야 한다. 1980년대 군사정부가 퇴출되고 교복도 사라졌다. 예전의 교복은 일본 군국주의의 산물이다. 남학생들의 교복은 말할 것도 없고 여학생의 교복도 마찬가지다. 일명 ‘세라복’이라 부르던 그 교복은 해군 사병의 군복 즉 ‘sailor' 복장이라는 뜻이다. 늦게나마 그런 교복이 사라졌다.

그러나 자율적 복장에 대해 불편해하는 이들은 여전했다. 특히 교사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외모에만 신경 쓴다거나(청소년은 외모에 신경 쓰면 안 되는가?) 지나치게 명품을 선호하여 빈부 격차의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것도 그 한 이유였다. 물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명품 선호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은 왜 반성하지 않는가?

누구나 명품 좋아한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번 돈으로 치장할 때 당당하다. 부모의 돈으로 그런 비싼 옷을 소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도록 가르치고 값싼 옷이더라도 멋지게 코디해서 입는 법을 학교에서 가르쳤으면 된다. 그러나 그런 학교 있었는가? 해야 할 것은 외면하고 부스러기 현상 몇 가지로 재단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퇴행시켰다. 그게 교육인가?

어떤 이들은 교복자율화 때문에 청소년 범죄가 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누구나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는 법이다. 교복을 입었던 사람들의 눈에는 교복을 입지 않은 학생들의 모습이 불안하고 언짢을 수 있을 것이다. 결정권도 자신들에게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 식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3년 만에 다시 교복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과정을 눈여겨봐야 한다. 교복을 처음 다시 입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특목고였다. 예전의 시커먼 교복도 아니고 파스텔 톤에 고상한 체크무늬 등 마치 미국의 사립학교 교복처럼 보였다. 남학생들은 넥타이도 매고 구두도 신으며 머리도 적당히 길렀다. 그러니 교복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적어도 어른들의 눈에는. 게다가 특목고가 먼저 입으니 그걸 따라 하는 것도 제법 괜찮다고 여겼을 것이다. 만약 교복을 먼저 입은 학교가 평판이 나쁘고 성적이 저조한 곳이었다면 좋다고 따라 하는 학교가 과연 있었을까?

아무리 어른들이 이러쿵저러쿵 입을 댔더라도 적어도 학교와 교사는 그런 간섭을 과감히 배척했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교사들이 엉뚱하게 교육적 효과 운운하며 태연하게 교복 도입에 입을 다물었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나는 교장이나 교사 연수 때 꼭 묻는다. 왜 학생들이 반드시 교복을 입어야 하느냐고. 그리고 교복을 입더라도 학생 스스로 선택하게 하면 안 되느냐고. 그러면 거의 대부분 대답한다. 학생은 교복을 입어야 한다고. 그럴까? 그럼 어른들은? 초등학생들은?

학생에게 선택하도록 하면 교복 입은 아이들과 사복 입은 아이들이 한 반에서 서로 갈리게 되어 갈등이 생긴단다. 그럴까? 물론 처음에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런 ‘껍데기’ 모습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런 조화와 공존이 바로 교육의 중요한 가치가 아닌가.

제발 어른들의 눈으로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의 삶을 재단하고 간섭하며 통제하지 말 일이다. 가뜩이나 우리의 교육은 시대에 뒤떨어져있다. 이제 일본도 이른바 4시선다형 문제를 출제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은 21세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방식을 고수한다. 이른바 객관적 평가의 틀 때문이다. 교육은 말로는 백년대계라고 하면서 실상은 백년하청이고 백약이 무효인 까닭은 철옹성 같은 대학 입시제도 때문이다.

그것을 깨뜨리지도 못하면서 지엽적인(?) 교복이나 투표권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하거나 미래지향적 의견도 제시하지 못하는 현재의 교육과 교육감들이 정말 진보적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청소년들이 입장에서, 그리고 21세기 미래의 관점에서 근본적 전환을 이뤄야 한다. 혁명이 필요한 시기다. 혁명해야 할 때 기껏 점진적 변화나 개혁에 매달리고 있다면(그나마도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은 시대에 대한 배반이고 미래 세대에 대한 장애일 뿐이다.

 

복음은 진보다!

교육계와 더불어 가장 보수적인 곳은 바로 종교계다. 현세의 삶보다 내세의 삶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중심인 것은 종교의 보편적 특징이기 때문에 자칫 현재의 지상의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방관적 입장인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기독교건 불교건 이슬람교건 거의 모든 종교는 엄청난 혁명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초기 불교의 혁명성은 고질적 카스트 제도의 옹벽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시대정신을 이끌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아쇼카 왕의 시대가 끝나자 불교가 억압된 것은 기존의 카스트 제도에 의존했던 기득권 세력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단단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 또한 그렇다. 구약의 시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말씀’으로 개편한 것이다. 차별과 억압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포용과 사랑의 보편성의 가치를 새롭게 선포한 것이 복음이며 예수님의 삶은 그 실천적 모범이었다.

그러나 이후 그리스도교가 국교화 되고 단단한 교계제도를 구축하게 되면서 부작용과 악행이 끊이지 않았다. 1517년 아구스티누스수도회의 마르틴 루터 신부는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고 저항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허물을 반성하기는커녕 자신들에 맞서는 루터를 파문했고 결국 유럽교회의 분열과 개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교회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트리엔트종교회의 등을 통해 새로운 쇄신을 꾀했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몸에 밴 교계제도의 습속은 여전히 강고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예언자적 통찰력을 지녔던 요한 23세에 의해 소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그 낡은 틀을 깨고 평신도의 참여 등의 문을 열었지만 오랫동안 몸에 밴 습속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한국교회는 그 초기에는 매우 열성적이었고 고 김수환 추기경 시절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복음적 해석과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 다시 보수화되고 더 나아가 수구적 태도로까지 퇴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수많은 이들이 정치 경제적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그 골은 여전히 남아있다. 교회는 그리고 신자들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복음의 전파를 전도와 포교의 수단으로만 삼을 게 아니라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복음의 실천은 지상의 일이지 천상의 일이 아니다.

앞으로 10년이 남은 21세기 전체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혁명이 필요한 시기다. 과거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는 교육도 종교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아니, 그 선봉에 서야 한다. 그게 시대정신이고 복음정신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비버리힐스나 강남구에만 살고 있지 않다.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다. 그런데 그들이 착취와 억압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 더 늦으면 전체가 무너진다. 임계점을 넘기 전에 고쳐야 한다.

과거에 비해 진보적인 교육감을 뽑아놓고는 교육이 진보적일 것이라는 착각은 위험천만한 것처럼 예전에 비해 느슨해진 교계제도의 엄격성을 조금 풀었다고 해서 열린 교회는 결코 아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 여기는 이들을 교육감으로 뽑은 게 시민들이다. 기존의 틀에 대한 실망과 위기의식의 산물이고 지혜롭게 선택한 것이다. 이제 그 선택은 종교로 옮겨갈지 모른다.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연대의식으로 실천해야 한다. 하늘나라를 제대로 전파하려면 땅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허물을 벗겨내야 한다. 탐욕과 거짓의 카르텔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 맨 앞에 서야 하는 것이 교육과 종교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 48)

 

<인문학자이며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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