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남미여행기-열세 번째 이야기 / 강진수

25.

비니쿤카를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도 힘들었다. 올라가느라 온 힘을 다 쏟아 부었던 탓에 하산할 체력이 남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얼른 내려가야만 했다. 비도 부슬부슬 오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혼자 말을 타지 않고 비니쿤카까지 올라간 탓에 우린 챔피온 팀에서 거의 꼴찌였기 때문이다. 가이드가 계속 우리 뒤에 바짝 따라붙어 얼른 가라고 채찍질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나와 에이미는 체력이 동나 중간 중간 바위 위에 드러누워 한참을 쉬곤 했다. 정말 아무 대화도 없이 바위와 한 몸이 되어 휴식에만 전념했던 것 같다.

원래 하산하는 길이 더 짧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하산이 더 오래 걸린 느낌이었다. 떨어지는 빗방울들에 의해 안 그래도 질척거리는 늪지대였던 땅이 진흙투성이로 완전 변해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말들과 야생 라마들이 맘껏 배출한 배설물들까지 진흙과 뒤섞여 걷지 못할 땅이 되어버렸다. 깨끗한 바위들만 찾아다니며 한참 폴짝거리다가 그마저도 도저히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포기해버렸다. 그래 신발과 옷 좀 더러워지면 어때, 지금 당장 내가 쓰러질 판인데. 결국 그 끔찍한 땅을 질퍽질퍽 걸으며 겨우 산을 내려왔다. 베이스캠프가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비니쿤카를 보았던 때처럼 감격의 순간에 젖어들었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트레킹이 모두 끝났구나, 우리는 마지막 스퍼트를 하는 운동선수처럼 엄청난 속도로 베이스캠프에 골인했다.

 

 

베이스캠프에 들어서자마자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기다렸다. 투어에는 아침과 점심이 원래 포함되어 있는데, 아침은 트레킹 전에 먹었고, 산을 다 내려오고 나니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뜻밖에 늦은 점심을 먹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체력은 완전히 방전되었고 숟가락도 들 수 없을 지경이라 식욕마저도 사라져 있었다. 굳이 밥을 먹겠다는 의지보다는 좀 앉아서 어쨌든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테이블에 붙어있었던 것일 테다. 곧 음식이 나왔다. 페루 전통 방식으로 구운 생선과 삶은 감자, 채소가 아주 조금 접시에 담겨져 나왔다. 식사에 별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접시에 있는 음식들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꼭 살기 위해서 식사하는 사람들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딱 살 수 있을 만큼만 우리들은 먹고 나머지 음식은 아쉽지만 남길 수밖에 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빗줄기가 조금 거세졌다. 바람도 더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가이드가 얼른 차에 오르라고 했다. 우리 덕분에 귀가 시간도 늦어지게 생겼단다. 에이미와 나, 그리고 형 셋은 옹기종기 버스 뒷좌석에 앉았다. 가이드가 버스에 올라 짧게 연설을 했다. 우리는 오늘 훌륭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 모든 여정에 충실히 임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위대한 사람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누구라고요? 그 순간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친다. 챔피언!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가이드는 멋진 웃음을 마지막으로 버스에서 내린다. 꼭 한 편의 연극처럼 그렇게 우리의 트레킹은 정말 마무리되었다.

 

 

버스를 타고 3시간은 가야 다시 쿠스코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기절하듯 버스에서 잠들었지만 1시간 조금 넘게 자다가, 덜컹거리는 버스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뒷좌석의 특혜 덕분에 반강제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잠에서 깨고 나서는 멀뚱멀뚱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형도 그렇고 에이미도 그렇고,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 둘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에이미 옆에는 페루 출신의 여자가 있었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왔다고 한다. 회사에서 경리일을 하며, 대학은 어디를 나오고, 전공은 무엇이고 등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 역시도 나에 대해 이것저것 말해주게 되었다. 전공은 철학이라고 하니 그 분이 매우 놀란다. 페루의 대학에서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다. 에이미가 장난으로 나를 놀린다. 어쩌겠는가. 그녀는 유망한 심리학과이고 나는 처량한 철학도에 불과하니.

한참 그렇게 웃고 떠들다보니 쿠스코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뒷좌석 멤버들끼리 작별 인사를 나눴다. 악수를 나누려고 하는데 아까 그 페루 여자가 나를 덥석 껴안더니 양 볼에 키스를 해준다. 나도 비주(bisou)를 알고는 있었지만 받아본 적은 처음이라 잠깐 당황했다. 그러고선 전혀 당황하지 않은 것처럼 최대한 자연스럽게, 나도 그녀의 양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렇게 인사하고 나니 왠지 더 친해진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연락처나 이름도 알지 못했으니, 오직 남은 것은 그녀의 인사법뿐이었다. 에이미와는 숙소 방향이 비슷해서 한참을 같이 걸어가다가 작별 인사를 했다. 에이미는 볼리비아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으므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서로 꼭 연락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그녀와도 깊은 포옹과 굿바이 키스를 나누었다. 너무 고단했던 하루의 끝에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따뜻한 코카차를 한 잔 마시고 다시 쓰러져 잠에 들었다.

 

26.

아침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오랜만의 여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와 형은 그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일 볼리비아로 떠날 것이고 비자는 이미 다 받아놓은 상태라, 이따가 낮에 버스터미널에서 라파즈로 가는 버스 티켓만 끊으면 되는 것이었다. 호스텔에서 주는 조식을 맘 편히 받아먹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커피와 코카차를 번갈아 마시고, 호스텔에서 주는 다양한 티백도 챙겨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빵은 갓 구워 부드러우면서도 바삭했다. 거기에 달걀도 하나 구워 주니 나름 진수성찬이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테라스에서 한참 또 앉아 있다가 슬슬 발걸음을 재촉해보았다.

점심도 꽤나 좋은 레스토랑에서 먹은 다음 우리는 터미널로 향했다. 올 때 버스를 타고 왔기에 이미 터미널 위치와 구조도 다 알고 있어 모든 게 순조로웠다.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버스 호객으로 난리다. 우리는 잠깐 벤치에 앉아 생각을 했다. 일단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티티카카 버스가 가장 시설이 좋고 국경을 넘어가는 부분에서도 안전하다고 하니 그 가격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티티카카 버스의 가격이 예상보다 더 높다. 그새 값을 많이 올렸나보다. 혹시 몰라 더 둘러보기로 했다. 여기저기 라파즈로 가는 버스를 알아보았지만 티티카카를 제외하고는 믿음직하고 시설 좋은 버스를 찾기 어려웠다. 쿠스코로 올 때 팔라미노 버스를 타고 꽤 고생했던 것을 기억하면 버스를 고르는 것에 신중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마침 누군가 우리를 부르는 게 아닌가. 한 아저씨가 크루즈 델 수르라고 적힌 간판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호객행위를 한다. 우리 역시 크루즈 델 수르를 잘 알고 있었다. 페루에서 가장 큰 버스 회사이자 고급 버스들을 운행하는 회사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값을 대체 얼마나 부를까 침을 꼴깍 삼키고 있던 차에 아저씨가 특별가로 판매하고 있다며 값을 쓱 적어 보여줬다. 티티카카와 엇비슷한 가격이었고 그리 비합리적이지는 않았다. 크루즈 델 수르라는 브랜드를 생각하면 말이다. 게다가 학생증을 제시하면 학생 할인을 조금 더 해주겠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수지맞은 셈이다. 형과 나는 슬쩍 눈빛을 주고받다가 티켓을 그 자리에서 얼른 구매했다. 영수증에도 크루즈 델 수르라고 적혀 있으니 믿음직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뒤통수를 칠 줄 어떻게 알까. 조금 다녀봤다고 자만하며 건방져진 여행자들을 제대로 혼쭐내주는 나라가 바로 이곳 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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