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 박석무

다산의 저서를 읽노라면 자신이 살던 시대의 인물인 두 사람을 대표적인 멘토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로는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이었고, 정치가이자 경제가로는 당연히 번암 채제공(蔡濟恭:1720∼1799)을 가장 숭배하고 따르던 인물이었습니다. 다산은 16세에 처음으로 성호의 유저(遺著)를 읽어보고 성호와 같은 학자가 되겠다는 뜻을 지니고, 평생 동안 그의 학문을 계승하고 학문적 업적을 현양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성옹화상찬(星翁畫像贊)」이라는 숭모의 정을 토로한 글을 지어 성호의 학덕에 대한 높은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글의 마지막 구절에서 

“누가 이 분을 저 깊이 묻힌 땅속에서 일으켜 세울 수 있어 끝내 억센 물결을 밀쳐버리고 수사(洙泗)의 물줄기로 돌려보낼 것인가. 슬픈지고!”라고 표현하여 공맹(孔孟)의 본원유교에서 벗어난 성리학만 연구하던 물줄기를 막아버리고, 다시 공맹의 유교로 돌려놓겠다는 자신의 뜻까지 은연중에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 500년의 긴 역사에서 재상다운 재상은 많지 않았는데, 다산은 채제공이야말로 몇 안 되는 재상다운 재상으로 여기며 아버지처럼 따르고 높이 그를 존경하였습니다. 다산은 「번옹유사(樊翁遺事)」라는 글을 지어 번암 채제공의 높은 기개와 당당한 정치가의 풍모를 참으로 훌륭하게 묘사했습니다. 83세의 영조가 52년의 군왕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자, 간난신고의 어려움 속에 영조의 손자이자 세손이던 25세의 정조가 왕위에 오릅니다. 11세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고 고아로 컸던 정조는 재기발랄한 홍국영의 도움에 힘입어 겨우 임금의 보위에 오르자, 시대는 바야흐로 홍국영의 세상을 맞았습니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세손을 보호하던 홍국영은 29세에 정조의 등극에 맞춰 승지에 임명되고 이어서 도승지에 올라 정조의 최측근 권력자로 우뚝 섭니다. 

궁궐을 보위하기 위해 신설된 숙위소(宿衛所)의 대장, 금위대장(경호실장)과 군권을 쥔 훈련대장까지 겸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권력에 힘입어, 권력의 영구화를 위해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하여 원빈(元嬪)이라 부르며 외척의 지위까지 차지했습니다. 후궁에 오른 누이 때문에 홍국영은 범접할 수 없는 권력자로 군림하며, 모든 고관대작들은 원빈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홍국영의 마음을 사려는 온갖 행태를 부렸습니다. 그럴 무렵, 궁중에는 새로운 의례(儀禮)가 생겨, 고관대작들이 궁중에 들어가 인사를 올리려면 먼저 임금, 다음에는 정비인 왕비에게 인사를 올리면 되는데, 홍국영에게 아부하려던 무리들이 후궁인 원빈에게도 문안 인사를 올리도록 새로운 절차를 제정하였습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있다가 돌아온 채제공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귀국 인사차 궁궐에 들어가 임금과 왕비에게만 인사를 올리자 집사들이 원빈인 홍 씨에게도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알려주자, “하늘에는 두 해가 없는 것인데 승통(承統)의 빈궁(嬪宮)이 아닌데, 어떻게 문안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고 그냥 궁궐을 빠져나오고 말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홍국영이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도 정당한 예절이 아닌 일에는 일체 응하지 않았던 기개 높은 채제공의 모습을 그런데서 볼 수 있다고 다산은 그런 부분을 찬양의 뜻으로 기록했습니다. 부당한 권력에 당당히 대응하던 채제공 같은 재상들의 모습을 오늘에도 보고 싶은 것은 나만의 소망일까요.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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