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의 극대화…몸으로 읽어라
유희의 극대화…몸으로 읽어라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8.08.0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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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 7회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 밀려날 때 저 밑바닥으로부터 번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어둠으로 몰려갈 때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말한다.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으로 살아남아 오래전 그 해변을 걷고 있다. 그 옛날의 우리로서 오늘의 이 해변을 걷고 있다. 누군가의 손이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테고. 누군가의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렸을 테고. 누군가의 눈이 누군가의 눈을 지웠을 테고. 누군가의 말이 누군가의 말을 뒤덮을 테고. 노을은 우리의 뒤쪽에서부터 서서히 몰려왔고. 서서히 물들였고. 서서히 물러났고.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보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마치 죽어가는 사람처럼. 언덕. 둔덕. 언덕. 둔덕. 언덕. 둔덕. 언덕. 둔덕.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진창에 빠지는 기분으로. 울음. 물음. 울음. 물음. 울음. 물음. 울음. 물음.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점점 더 물러나는 기분으로. 그때에도. 이미. 벌써. 여전히. 아직도.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라고 믿는 마음이 있었을 테고. 순도 높은 목소리 사이사이로 몇 줄의 음이 차례차례로 울렸을 테고. 뒤가 없는 듯한. 이미 뒤가 되어버린 듯한. 어떤 나지막한 목소리 사이사이로. 어떤 풍경이. 어떤 얼굴이. 어떤 기억이. 어떤 울음이. 점점이 들렸을 테고. 귀신에 들리듯. 바람에 날리듯.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너는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너는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듣고 있다고.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 그 사이와 사이. 다시 그 사이와 사이사이의 사이. 사라지는 이 순간만이 오직 아름답다고.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로 사라질 때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가. 밤은 밤으로 다시 건너가고 있는데. 하루는 하루로 다시 기울고 있는데.

-이제니,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꽂히는 순간이 있다. 시인들은 그런 순간들을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시라는 것은 사실 말과 말이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이 되어 부딪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내뱉는 말들이 실은 어떤 우주의 내부에서 부유하고, 또 어떤 힘에 의해 당겨지거나 밀려난다는 것을 시인들은 포착해내고 보여준다. 누군가는 심오하게 보일 뿐인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시가 말장난인 것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말을 가지고 노는 것은 시의 당연한 역할이다. 다만 그 놂의 영역이 매우 복잡한 차원의 개념들을 오고간다는 점은 시가 가지는 가장 특이한 부분일 것이다. 이제니의 시는 그런 유희의 광범위성을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 사진=pixabay.com

 

유희의 가장 재밌는 지점은 비슷한 언어의 반복이다. 언어의 유사성으로 하여금 운율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시를 쓴다고 하면 당연히 이런 운율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맥락 없이 유사한 단어들을 늘어놓는다고 운율이 유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강제로 만들어낸 운율은 시를 단조롭고 재미없게 만든다. 위의 시를 보라. 언덕과 둔덕은 발걸음의 소리를 연상시키고, 울음과 물음은 뭔가 물컹거리는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진창에 빠지는 기분을 대신하게끔 한다. 그리고 시인이 나열한, ‘그때에도, 이미, 벌써, 여전히, 아직도’는 단어들이 서로 가지는 관계를 통해 유희를 유도한다. 아주 부분만 보았지만, 시인의 시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읽기만 해도 그 자체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소리를 내서 읽으면 그 재미는 더하다. 시가 가지는 가장 까다로우면서도 재밌는 특질을 시인은 센서티브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유희의 성질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이제니 시인의 시에서 드러나는 서사다. 시에서 서사는 물론 소설의 것보다는 복잡하거나 면밀하지는 않겠지만, 서사가 없으면 시가 갖는 흐름이 나약해진다. 시가 단어들을 꽉 잡아당기는 힘은 약간의 서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다. 위의 시도 서사의 사이사이에 별다른 설명을 갖추지는 않지만, 오히려 서사를 짧게 쪼개어 시선이 다양한 방면으로 움직일 수 있게끔 하고 있다. 조각난 서사들이 시 전체에 흩뿌려져 있지만 이 서사들이 있기에 발걸음 소리도, 진창에 빠지는 기분도 더 의미 있게 전달될 수가 있다. 결국엔 무슨 의식의 흐름대로 쉽게 시를 쓰는 것 같은 시인들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의식의 흐름으로써 이제니 시인이 위와 같은 시를 썼다면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의식의 흐름 같이 보이게끔 만드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유희와 서사를 둘 다 세심하게 조절하면서 동시에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단어가 드러남에도 그것에 시 전반이 묻혀서는 안 된다.

이런 테크니컬한 요소로서 시를 바라보게 되면 그것들을 찾아내는 재미는 잠깐 있을지라도, 평론가들이 늘 그렇듯, 시를 한 편 읽으면 머리가 지끈지끈할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분석을 곁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를 읽는 것에 있어서 앞선 내용들은 참고하는 부분일 뿐이다. 시가 의식의 흐름대로 쓰이진 않았더라도, 읽을 때는 의식의 흐름대로 읽는 것이 좋다. 시인의 의식을 찾아 그 흐름을 따라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의식대로 읽는 것이다. 시를 읽을 때만큼은 시는 독자의 것이다. 그러니 언덕과 둔덕, 울음과 물음을 찾아내지 못해도 상관이 없고, 혹시 그런 유희적 요소에 어떤 대단한 의미를 갖다 붙이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런 노력들은 이제니의 시를 이제니답게 읽지 못하게끔 만든다. 이제니의 시는 결코 머리로 읽어야 하는 시가 아니다. 대부분의 시가 그러하듯이, 그녀의 시 역시 몸으로 읽어야 한결 즐겁다.

유희에서 소리를 내어 읽으면 그 지점들이 더 잘 드러난다고 했듯이, 소리를 내어 시를 감상하는 것은 몸으로 그것을 읽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처럼 이제니는 자신의 시로 하여금 독자가 그들 몸을 쓸 수 있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몸으로 시를 읽는다는 것은 결코 소리 내어 읽는 것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복잡하고 어려운 말일 수 있다. 굳이 몸이 움직이거나 사용되지 않더라도, 시를 읽다보면 온몸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있다. 즉 시를 몸을 통해 받아들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니의 시에서 드러나는 시선과 잘게 나누어진 서사들은 둥글게 뭉쳐져 하나의 거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그게 어떤 주제성이나 사회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해석할 수 없는 관념은 부유하고 무슨 블랙홀처럼 어떤 힘을 갖는다. 몸을 통해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라는 우주 속의 단어와 단어들이 갖는 관계, 또는 상호작용들을 머리가 아닌 피부로 체득하는 것이다.

이토록 어려운 시 읽기를 요구하는 것이 때로는 이제니의 시이기에, 그녀의 시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기력해보이면서 전혀 기력을 잃지 않고 있고, 상당히 순간순간의 포착이 섬세한 것 같으면서도 그것 모두가 무의미하다. 이런 모순과 모순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듭하면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아진다. 그러나 시의 끄트머리에서 서사를 마무리하는 그녀의 노련함을 보라. 밤은 밤으로 다시 건너가고, 하루는 하루로 다시 기운다. 모순이든 모순이 아니든 그녀의 세계는 저물다가도 다시 떠오르길 반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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