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섬진강 마실-포동마을 ①

▲ 마을박물관에 걸린 포동마을 그림지도. 마을 앞으로 섬진강물 흐른다.

옛날에는 배가 아니면 다닐 수 없는 오지여서 나루터가 있었다는 마을. 마을 이름자 ‘포(浦)’에도 그 내력 깃들었다. 용포리 포동마을 사람들에게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 줄기는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길이기도 하였다.

 

밥그륵 높은 자리부터 앙글라고 허지

이제는 나루터 대신 마을카페와 마을박물관이 자리한 들머리에서 뵈온 안명환(78) 할아버지가 해설사가 되어 주셨다.

짚신 삼던 신골이며 병아리 키우던 닭어리며 온갖 농기구까지 집집이 간직하고 있던 일상용품들과 마을 사람들의 옛사진들을 전시한 포동마을 박물관. 정지 살강에 포강포강 엎어 놓던 흰 사발 흰 대접, 끼니마다 밥상에 올리던 밥사발 국대접이 이제 유리진열장 안에 들어 있다.

“전에 어른들은 다 그렇게 묵었어. 밥 한 그륵을 다 묵어도 밥이 금방 꺼져 버려. 뱃가죽이 딱 붙어버려. 일을 원청 단단히 헌게로. 기계가 워딨어. 그 농사일을 몸뚱아리 한나로 다 허고들 살았잖여. 전에는 밥 말고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지. 샛거리라고 하지감자 몇 개 쪄 묵고, 그것도 못 묵는 사람도 있고.”

먹을 것은 없고 일은 많던 시절이었다.

“모 심으러 가서 들밥 나오문 밥그륵이 어떤 놈이 높은가 그것부터 봐갖고 자리에 앙겄어. 한 숟구락이라도 더 묵을라고. 고봉으로 엉근 밥을 먹고 더 먹고 나문 인나들 못히갖고 찔갱이풀(질경이)이라고 있어. 그놈 잡고 인나. 그렇게 묵어도 금방 꺼져버려.”

 

▲ 집집이 대문 옆에 조각작품 같은 ‘집간판’이 걸렸다. 박주순 할매 댁.

 

열 여섯 살에 ‘내 지게’를 가졌다는 할아버지. 밭쟁기와 논쟁기 앞에서는 끄는 시늉을 해 보이는 친절한 해설사다.

“밭쟁기질이 심들어. 깔막(비탈)진 디라 소가 잘못 가문 두룩이 삐틀삐틀 나버려. 그런게 밭쟁기는 꽉 눌르고 댕긴 것이고 논쟁기는 꼬뺑이(고삐) 잡고 소 간 것만 쳐다보문 되야.”

“이것은 멍에. 소 모가지에다 거는 것이여. 전에 어짠 소는 멍에만 봐도 주저앙거버려. 요새 소는 멍에 안 걸어. 모다 일 안 시기고 고깃소잖여. 전에 일소는 일허느라고 공이가 딱 백여.”

할배는 ‘쟁기질 대장’이었다. “나는 소 한 마리 갖고 누가 쟁기질 히 도라 그러문 쟁기질 히 주고 그맀어. 한 이십 년 같이 살았어. 거청허니 정 들었어.”

나중에는 소가 할배 속맘을 다 알더란다.

“내가 막걸리 한잔 묵고 노래를 불를라고 허문 힐끔힐끔 나를 쳐다봄서 아구부터 새겨(새김질). 나는 노래허고 저는 깨물고 그렸어. 그란디 그 소를 내 형편상 소전에다 팔았어. 쟁기질 잘 갈쳐논게 딴 사람이 일소로 가지갔어. 아 근디 이놈의 소가 나오드락까지 나만 쳐다보는 거여. 어떻게 맘이 안 좋던지 시방도 그 눈이 또록허니 생각이 나.”

유물과 유산은 박물관에만 있지 않다. 해진 양말짝으로 손잡이를 야물게 돌돌 감싼 꺼멍가마솥. 스물 네 살 적 시집와서 이 솥을 장만했다는 할매. 이 솥에 오만 것을 다 삶아 내고 쪄 내고 데쳐내기를 거듭하며 아들 셋 딸 하나를 키워냈다. 제 속을 팔팔 끓여 소임을 다하는 가마솥의 노고 곁엔 늘 어매의 땀이 함께 하는 것이니. 아직 녹이 슬지 않은 가마솥이란, 여전히 많은 사람의 입을 즐겁게 하고자운 어매의 동분서주가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제 속을 끓여내 소임을 다하고 텅 비우고 나야 비로소 물러나앉는 가마솥의 보시행은 꼭 늙은 어매를 탁한 것이다.

“바뻐. 지금이 꽤 모종 헐 때여. 꼬치는 며칠 전에 다심고 인자 고구마 심고 콩 심고, 심을 것이 많애. 그 담으로는 들꽤 모종 욈겨야 허고, 또 그 담으로 7월 처서 넘으문 짐장 짓가심 심어야 해. 일년 헐 일이 꽉 짜져 있어. 누가 허라 허는 것도 아닌디 내한테는 숙제여.”

‘오늘의 숙제’를 찾아 발태죽을 내온 걸음걸음들이 있어 초여름 들판엔 푸르름이 성성한 것이니.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최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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