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비채

타이타닉 호를 닮은, 물 위의 작은 도시 빅토리아 호. 이곳에서 태어나 일생을 바다를 떠돌며 연주한 천재 피아니스트가 있다. 단 한 번도 육지를 밟은 적 없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그는 ‘존재한 적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친다. 그럼에도 육지로 나아가 넓은 세상을 만나는 대신 꼭 2000명만큼의 세상을 접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의한다. 88개의 유한한 건반으로 무한한 음악을 연주하는 일. 훗날 빅토리아 호가 전쟁으로 망가져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파될 때조차 그는 배를 떠나지 않으려 한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과 음악극 <노베첸토>로 먼저 알려진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모놀로그 《노베첸토》가 비채에서 출간되었다.

‘팀 투니’의 목소리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 위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대형 여객선 빅토리아 호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팀은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노베첸토의 친구이자 관찰자이다. 20세기가 열리는 해에 태어나 ‘노베첸토(20세기를 뜻하는 이탈리아어)’라는 이름을 얻은 아이. 누구도 그에게 음악을 가르친 적 없지만 노베첸토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피아노를 연주했고, 전설의 피아니스트로 성장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실존 인물인 ‘젤리 롤 모턴’과 피아노 경합을 벌인다. 육지로 나아가 부와 명성을 얻을 기회도 있었지만 그는 무한한 세상과 맞닥뜨리는 대신 배라는 유한한 세상을 선택했다. 유한한 세상에서만 무한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고, 음악은 그에게 곧 삶이기 때문이다. 팀은 또 다른 인생을 꿈꾸며 배에서 내리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전쟁으로 망가진 빅토리아 호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파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노베첸토가 끝내 내리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도.

《노베첸토》는 1인극을 위한 모놀로그이다. 무대에 선 배우는 선상의 쇼를 이끄는 진행자가 되어 화려한 입담을 펼치고, 이야기의 화자이자 트럼펫 연주자 ‘팀’이 되어 노베첸토의 삶을 서술하고, 노베첸토 자신으로 분하기도 한다. ‘모놀로그’답게 호흡은 짧고 전개는 빠르며 대화는 절제되었지만 독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진정성 있게 드러낸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음악이다. 작가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작가일 뿐만 아니라 음악원에서 수학한 음악학자로, <라 레푸블리카>에서 음악평론가로 활동했다. 음악에 정통한 그이지만 이 모놀로그에는 정확한 곡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실존 인물인 젤리 롤 모턴과의 대결이나 청중의 반응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뮤지션이자 음악감독인 ‘푸디토리움’ 김정범은 권두에 쓴 작품 소개에서 노베첸토가 셀로니어스 멍크(Thelonious Monk)나 레니 트리스타노(Lennie Tristano)처럼 그야말로 존재한 적 없는 음악을 연주했을 거라고, 그러나 구체적인 곡명의 유무와는 무관하게 이 책 전체에 음악이 넘쳐 흐른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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