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사건도 많았고 손님들도 많았던 분주했던 죽산읍내 장날도 저물어갔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이발소 문을 닫은 주인장과 그 아들은 이발소 안 한쪽 구석의 나무괘짝을 열어보며 즐거워했다. 그 안에는 500원짜리 1000원짜리 지폐는 물론, 50원짜리와 100원짜리 동전도 수북히 쌓여 있었다.

난 바로 눈 앞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본 적이 없었다. 신기했다. 넋이 나간 듯 바라보고 있었다. 부자는 그 돈을 열심히 세었다. 그리고 나를 불렀다. 주인장이 "오늘 수고했다"며 맛있는 과자나 사먹으라며 나에게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밀었다. 세상에…이렇게 기쁠 수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저 난 조금이라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서 일을 한 것이었지, 어떤 댓가가 주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벌써 100원이란 엄청난 거금을 받다니…. 더욱이 그 돈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직접 번 것이었으니 그 감동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난 뛸 듯이 기뻤다.

신이 나서 이발소 정돈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낮에 있었던 선생님과의 일은 벌써 까마득히 잊혀진 상태였다. 난 방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이 부시게 빛나는 그 100원짜리 동전을 만지작 거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간신히 잠에 들기 전 난 그 돈을 나만이 알 수 있는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지금도 그 때 일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리고 절로 웃음이 나온다.

 

▲ 사진=pixabay.com

 

그렇게 죽산읍내에서의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모두 내게는 새롭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날들이었다. 그만큼 내 생각의 세계도 더 커져만 가고 있었다. 일을 배우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주인장 아저씨는 내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약삭 빠르고 당차게 일을 잘 한다며 입에 침을 바를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주인장이 중학생들의 빡빡머리는 내가 깎이도록 맡길 정도로 신임도 얻고 있었다. 또 주인장이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는 사이 내가 손님의 의자를 뒤로 제끼고 면도를 하는 일도 있었다.

하루는 면도를 하다가 그만 면도칼로 손님의 얼굴에 꽤 큰 상처를 낸 일도 있었다. 이발은 하지 않고 면도만 하러 온 손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도 평소 하던 대로 손님을 의자에 눞게 한 뒤 얼굴에 따뜻한 물을 묻혀 비누칠을 했다. 그런 다음 벽면 기둥에 걸려 있는 소가죽을 잡아당긴 채 그 위에 면도날을 갈아 세웠다. 그리고 손님의 얼굴을 돌려 오른쪽을 면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손님이 얼굴을 홱 돌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면도칼이 그만 손님의 얼굴을 그어버렸다.

이발하다 보면 가끔 편안해서인지 잠에 빠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 손님도 내가 면도하는 사이에 어느새 곤하게 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면도칼을 갖다 댄 순간 그만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돌려버린 것이었다. 손님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난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어쩔 줄 몰라하며 벌벌 떨고 있었다. 주인장이 재빠르게 다가와 응급 치료를 했다. 다행히 손님은 마음씨가 좋은 분이었던 것 같다. 자기가 잠결에 움직여서 생긴 일이라는 걸 알았고 "괜찮다"며 나를 오히려 위로해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한동안은 겁이 나서 면도칼을 잡지 못했다.

죽산읍내는 5일에 한번씩 장날이 돌아왔다. 장날마다 일이 끝나고 나면 주인장은 내게 맛있는 것 사먹으라며 100원씩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받은 100원짜리 동전을 난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곤 전부 모아두었다. 게다가 손님들이 이발을 마친 뒤 가끔씩 봉사료(팁이라고 했다)로 10원, 20원씩을 주고 가는 일도 있었다. 그런 돈들도 전부 모아두었다. 나중엔 동전이 꽤 수북히 쌓였다. 방에 감춰 둔 동전들은 잃어버릴 염려는 별로 없었다. 방을 혼자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모아지는 동전의 양이 많아질수록 불안감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낮에 이발소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방 한쪽 깊은 곳에 감추어둔 동전들이 떠올랐다. 마음이 안절부절했다. 결국 방에 돈을 그대로 놓아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죽산읍내엔 농협이 있었다. 그곳에 저금을 할 수 있는 곳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 바로 그곳에 저금을 하는 것이야.

난 이발소에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죽산읍내에 있는 농협으로 달려갔다. 창구엔 예쁘장한 누나가 앉아 있었다. 난 그 누나에게 다가갔다. 그 누나 앞에서 내가 입고 있던 옷의 여러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전을 꺼내며 저금하러 왔다고 했더니 그 누나가 활짝 웃으며 내 볼을 어루만졌다. 나이도 어린 아이가 저금을 하겠다고 하니 대견스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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