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섬진강 마실-반용마을 ②

▲ 강은 온갖 고기를 품고, 생명을 품고, 이야기를 품고.

“여그는 사방서 물이 모여드는 디라. 저어 백운면 꼴짜기 물도 이리 오고 달길 물도 오고. 요 섬진강 물이 없었으문 농사 못 지서. 요 물로 농토를 적시기때매 살아나왔지.”

평생 그 강물에 기대어 살아 온 김경남(79) 할아버지.

“옛날에는 차릿물 대고 그랬어. 오늘 저닉에 우리집서부터 물을 대문 다음에는 저 밑에서부터 물을 대올라오는 거여, 차례차례. 모래땅이라 물꼬를 막으문 바로 말라불어. 물이 귀한게 물꼬싸움도 많앴지.”

물건너 있는 논밭에 가려면 바지가랑이 걷어올리고 찰방찰방 처벅처벅 물을 건넜다.

“소도 같이 건네다니고. 소들도 고생했지. 큰물지문 못 나가고.”

물 건너 농사 지어 쌀 콩 팥 깨 거두면 이고지고 또 물 건너 장을 오갔다.

반용마을은 진안땅이지만 장은 임실 관촌이 제일 가까워 주로 관촌장을 봤다.

“여그서 20리여. 두 시간 반이나 세 시간은 걸렸어. 쌀 한 가마니썩 짊어지고 갈란게. 관촌장을 갈라문 물을 세 번을 건네. 여그서 건네고 포동마을 물을 건네고 임실 방수리 물을 건네고. 짚신 삼아서 신고 물 건네고 겨울에도 얼음이 버썩버썩헌디도 가. 장에 가서 곡석을 내야 돈도 맹글고 뭣도 산게.”

 

▲ 평생 섬진강에 기대어 살아온 김경남 할아버지. 강에 얽힌 이야기라면 강물처럼 마르지 않고.

 

물 건너 산 넘어 장에 가던 길.

“지금은 그 질이 묵었지. 댕기들 안한게 나무가 꽉 차버렸어. 인자 우리들 마음속 머릿속에만 남았지. 환해, 그 질이. 지금도 그 질로 가라문 쪼옥 찾아갈 것이여.”

장에서 꼭 사와야 할 필수품으로는 성냥과 기름이 있었다.

“불쓰는 성낭, 그때는 그것 없으문 밥을 못해 묵어. 불을 때야 헌게. 밤으로는 호롱불 써야 된게 지름도 꼭 있어야쓰고.”

장날 국밥 한 그릇과 술 한잔은 그 시절 가난한 아비들이 누리던 호사였다.

“내장국 국밥 한 그륵씩 묵으문 어찌 그리 맛납던고. 그 옛날에는 그것이 기똥차게 맛났어.”

젊은 날, 김경남 할아버지는 한지공장에서 일한 적도 있다.

“종우 한나 만들라문 여런이 여러 일을 히야써. 나는 종우를 방맹이로 뚜드는 일을 했어. 인자 종우가 되겄다 헐 때까지 한허고 메로 뚜드는 거여.”

반용마을엔 한지공장이 두 군데 있었고 뒷산에는 광산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채굴한 금을 장항제련소로 보냈으며 이후 마을에 공장을 세워 직접 금을 선별하기도 했다.

“성수면에서 돈이 질로 많이 궁근다는 곳이 여그였어. 긍게 사방에서 사람들이 들어와갖고 동네가 커졌지. 종우공장에도 일허러 오고 광산 일꾼들도 들오고.”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최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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