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과 <해운대 엘레지>
이소선과 <해운대 엘레지>
  • 이수호
  • 승인 2018.09.10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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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호 칼럼>

지난 3일 우리 노동자의 영원한 어머니 이소선의 7주기 추모 행사가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촉촉이 내려 참가자들의 마음까지 젖고 있었지요. 

지난여름은 몹시 더웠고, 촛불혁명의 성과로 출범한 문재인호는 노동자의 최저임금 인상의 파고도 넘지 못하고 표류하며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이나 전교조의 법외노조 처분 철회 등 지난 정권의 대표적 적폐마저 해결하지 못한 채 길거리 농성장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전주시청광장 조명탑 위나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꼭대기 등 고공농성 노동자들의 내려 올 길도 만들어 주지 못했고요. 

 

 

노동 존중의 기치를 세우며 촛불혁명 정부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지 추모 분위기는 착잡했습니다. 좋은 소식 가져오지 못해 미안하다며 울먹이는 유가협 회장의 추모사가 빗물에 흔들리는데 몇 걸음 아래에는 평소에 그렇게도 살뜰히 어머니를 챙기던 노회찬이 한 달반여 전에 와서 묻혀 있고, 바로 위에는 한울삶 사무실에서 고스톱도 같이 치며 동고동락하던 박정기 아버님까지 최근에 와서 묏등 잔디가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비는 가늘어졌고 어머니는 예처럼 포근했습니다.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 참가한 200여 식구들에게 한마디씩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여름 너무 더웠지요? 전기세 무서워 에어컨도 제대로 못 틀고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문재인 정부가 촛불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안타깝지요? 문재인 대통령이 더 힘내도록 더 열심히 싸워야겠어요.”

“힘들 내세요. 우리가 언제 누구 믿고 기대고 살았나요? 우리가 하나 되고 우리가 힘을 모으고 우리가 힘차게 싸워서 우리 세상 우리가 만들어야지요.” 

잔잔한 어머니의 위로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됐습니다. 

어머니 장례 때 어머니 평소의 말씀대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함께 하고 시민사회단체나 시민들도 힘을 모아 만든 이소선 합창단의 <손 내밀어>가 빗속에 어머니 말씀처럼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떠나는가?/ 내밀던 손끝인 줄 몰라 잡지 못했네./ 그대에게 내미는 손/ 사랑인 줄 몰라 주춤거렸네./ 손 내밀어 잡아줘. 하나 되어줘./ 우린 아픈 남이었잖아./ 손 내밀어. 안아줘. 사랑 되어줘./ 우린 슬픈 따로였잖아./ 떠나는가?/ (중략) / 지금 그대가 건네는 손 잡아보니 이젠 알겠네./ 믿음으로 내미는 작은 손./ 마주 잡고 하나 되었네.” 

우리는 서로 내미는 손이 사랑인 줄 몰라 ‘아픈 남’이었고 ‘슬픈 따로’였다는 고백과, 믿음으로 내미는 손을 서로 잡아주고 안아줄 때 하나가 되어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그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민중가수 박준의 ‘추모의 노래’ 순서가 됐습니다. 싸우는 민중의 투쟁 현장에서 선동 투쟁가를 잘 부르는 가수지요. 어머니 살아계실 때 투쟁 현장에서 자주 만나기도 해서 누구보다도 어머니를 잘 알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기타를 메고 나와 줄을 고르며 노래를 준비할 때 우리는 또 어떤 힘차고 엄숙한 노래가 나올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준이 조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오늘은 비도 오고 하니 어머니가 평소에 좋아하던 노래를 어머니를 위해 부르겠습니다.” 하더니, 흘러간 옛날 유행가를 간드러지게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은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울던 물새도 어디로 가고 조각달도 흐르고/ 바다마저 잠들었나. 밤이 깊은 해운대/ 나는 가련다. 떠나가련다. 아픈 마음 안고서/ 정든 백사장 정든 동백섬 안녕히 잘 있거라.” 

<해운대 엘레지>가 비 내리는 마석 모란공원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입주한 노회찬, 박정기 아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가 바라보며 오른 쪽 언덕 위에 있는 조영래 변호사와 문익환 목사도, 왼쪽 언덕 위에 있는 김진균 교수도 빙그레 웃는 것 같았습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어머니는 손 내밀어 태일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모란공원 열사묘역 160여 영령들은 하나 돼 같이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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