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서울행 직행버스에 몸을 싣다!
드디어 서울행 직행버스에 몸을 싣다!
  • 김덕희
  • 승인 2018.09.12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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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찾아온 아버지는 말그대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마치 산적같은 덥수룩한 머리에 움푹 패인 얼굴. 때문에 면도를 하는 것조차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난 움푹 패인 아버지의 양볼을 손가락으로 잡아 당기며 간신히 면도를 했다. 정말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했는데 한군데도 상처 난 곳 없이 무사히 면도를 마칠 수 있었다.

주인장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흡족해 하셨다. 아마도 "것봐, 내가 당신 아들 기술 하나는 제대로 가르쳤지?"하는 은근한 자랑으로까지 느껴졌다.

면도를 다 끝내고 눕혀 있던 의자와 함께 아버지를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는 내가 면도한 부분들을 손으로 만지작 거리시면서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내가 보기에도 면도를 마친 아버지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해지셨다.

난 머리를 감겨드리기 위해 아버지를 세면대 쪽으로 모셨다.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십수년을 살면서 단 한번도 아버지의 머리를 감겨 드린 적이 없었다. 기분이 묘했다. 여러번 비누칠을 거듭해가며 아버지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감겨드리고 난 후 개운해 하시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자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아버지 이발이 끝났다. 아버지께서는 예전과 달리 주인장과 함께 술을 드시러 나가지 않고 나에게 잘 있으라는 인사만 하고는 혼자서 이발소를 빠져 나가셨다. 아마도 이날이 장날이라 이발하러 오는 손님들이 많다보니 주인장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셨나 보다. 의자에 앉아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술 한 잔 하러 가자는 주인장의 말까지 뿌리치시고 황급히 이발소 문을 열고 나가셨다.

순간 나도 후다닥 아버지 뒤를 따라 나왔다. 머리를 감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찾아오신 아버지를 그냥 보내드릴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따끈한 밥에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술이라도 한 잔 사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를 중국집으로 모시고 갔다. 자장면 곱빼기를 한그릇 시킨 다음 잠시만 기다리시라 하고는 재빨리 농협으로 뛰어갔다.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그동안 저축해놓은 돈을 찾기 위해서였다.

농협 창구 누나에게 2000원만 찾아달라고 숨을 헐떡이며 부탁했다. 그 누나는 흠칫 놀랐다. 그동안 단 한번도 돈을 찾은 일이 없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한꺼번에 찾아달라고 하니 놀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엔 2000원은 상당히 큰 금액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자장면 한그릇 값이 150원 쯤 됐다.

누나는 돈을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난 자초지정을 얘기했다. 누나는 활짝 웃음을 지은 채 "효자 났네!"라며 돈을 찾아주었다. 난 돈을 주머니에 넣은 채 중국집으로 뛰어갔다. 아버지께선 그 사이 이미 자장면 곱빼기를 다 드시고 담배를 피워 물로 계셨다. 자장면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은 아버지께 드렸다. 술 한 잔 사 드시라고 하면서…. 그리고 중국집을 나와 다시 이발소로 향했다. 머리를 감겨야 할 손님들이 무척 많이 밀려 있을 것이다. 내 12살의 이른 봄날이었다.

이발소 주인장은 한 달에 이틀을 쉬게 해주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휴일 날만 되면 방구석에서 하루종일 잠만 잤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일하다 보니 피로가 누적돼 휴일만큼은 푹 쉬고 싶어서 꼼짝도 안했던 것이다. 무척 일이 힘들고 고달팠지만 시간이 가고 5월이 되자 차차 이발소 생활에 적응했고, 휴일이 되면 더 이상 방구석에 있고 싶지 않았다. 어디론가 가보고 싶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휴일날 문득 서울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발소 안에서 손님의 머릴를 감기며 창문 밖으로 매일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서울행 직행버스를 봐오던 터였다. 마음이 설레었다. 날이갈수록 서울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서울 친척집을 방문하느라 용산터미널에 내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용산터미널까지만 갔다가 내려오면 되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그리고 햇볕이 따사롭게 비치던 어느 휴일날 난 죽산읍내 터미널에서 드디어 서울행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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