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즈, 쏟아지는 은하수, 아름다운 밤이여!
라파즈, 쏟아지는 은하수, 아름다운 밤이여!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8.09.14 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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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열다섯 번째 이야기 / 강진수

29.

쿠스코에서 버스를 탄지 7시간 정도 되었을까. 밤새 기절하듯 잠들었던 나는 차창 사이로 눈부시게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두 눈을 비볐다. 커튼을 살짝 걷어보니 이미 바깥은 환한 아침이었다. 버스는 푸노 근처로 향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티티카카 호수의 푸른빛과 푸노의 건물들이 희끗희끗 보이기 시작했다. 푸노에 다다랐다는 것은 우리 버스가 페루를 벗어나기 일보 직전이라는 뜻이다. 멀리 있는 것만 같던 티티카카 호수가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마음 같아선 푸노에 내려서 티티카카 호수에서 며칠 머무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쿠스코에서 머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아쉽지만 차창을 통해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버스는 티티카카의 둘레를 돌며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푸르른 호수와 하늘, 그리고 호숫가에서 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호수가 멀어져가고 다시 푸른 들판만이 하늘과 대칭을 이루고 있을 때 즘 버스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작은 국경 마을로 버스는 들어섰고 페루 출국심사대 앞에서 내리게 되었다. 나는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버스들이 승객들을 제대로 기다리지 않고 국경에 버려두는 경우가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다행히 우리 버스의 앞자리에 유럽에서 온 듯 보이는 외국인 커플이 있었기에, 그 둘만 잘 따라가자는 심정으로 심사대 앞에 줄을 섰다. 볼리비아로 넘어가려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그에 비해 심사대의 규모는 작고 일하는 사람 수도 얼마 없다보니 줄이 계속 길어지는 상태였다. 게다가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업무를 보는 사무관들도 줄 늘리기에 한 몫 하고 있었다.

 

 

컴퓨터가 작동이 잘 안 되는지 사무관들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줄의 위치도 계속 변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컴퓨터를 옮겨 다니는 것도 부족해서 이젠 노트북까지 들고 와서 새로 연결하고 있는 사무관들이었다. 조금 답답해져 오기 시작했지만 이곳에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내가 뛰어나게 스페인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다가, 스페인어를 잘하더라도 이곳 사람들, 특히 공무원들과 시비가 붙으면 무조건 나에게 문제가 생길 것이 뻔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최대한 인내하는 마음으로, 심호흡도 천천히 해가면서, 참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미를 여행하는 동안에 이런 일은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이보다 더 심한 일도 훨씬 많기 마련이다. 가끔 속 급한 한국 여행객들이 국경 마을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는데 절대로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럴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런 행동은 여행객으로서 별로 안전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드디어 기다림의 끝에 내 순서가 왔다. 나는 자신 있게 웃어 보이며 여권을 내밀었다. 한참 내 여권을 뒤적거리던 사무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빨리 버스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에 이곳에 머물 시간도 많이 없을뿐더러, 내가 문제가 되면 뒤에 줄 선 여러 사람들에게 전부 피해가 가기 때문이다. 사무관에게 무엇이 문제냐고 물어보자, 사무관은 다른 창구를 가리키며 그곳으로 가라고 내게 말했다. 다행히 나만 이동하면 되는구나 하며 다른 창구로 발걸음을 옮기니, 사무관들이 나와서 내 뒤에 서있던 줄을 모두 나를 따라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내 뒤에 선 누구도 심사를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러니 초조한 것은 나였다. 창구에 기대어 사무관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 중 친절한 사무관 하나가 전산시스템 오류로 내 입국 자료를 확인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조금만 기다리면 전산이 정상화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대체 언제 전산이 제대로 돌아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시 무작정 기다림이 시작되었고 나는 괜한 미안함으로 뒤도 감히 돌아보지 못하였다. 옆의 형만 바라보면서, 이게 뭔 일일까, 마음만 계속 졸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여유로운 자는 어떤 위험 앞에서도 초연하다. 그리고 초연하다보면 언젠간 그 위험이 해결되고 만다. 여행은 그런 고리와 고리 간의 연결점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다. 나는 아직 그 첫 번째 고리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아까의 그 친절한 사무관이 돌아와 전산이 정상화되었다며 내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었고, 나는 신이 나서 춤을 덩실덩실 추며 볼리비아 심사대로 넘어갔다.

볼리비아에서의 심사는 순조로웠다. 이미 고역은 쿠스코에서 다 치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제부턴 볼리비아다. 남미에 와서 처음으로 육로로 국경을 넘고, 처음으로 여권에 새로 도장을 받았다. 볼리비아에서는 무슨 새로운 일이 있을까, 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다만 무사히, 볼리비아가 나를 받아들여 주기를. 차창 너머 ‘볼리비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간판이 스쳐 지나간다.

 

 

30.

국경마을을 지난 이후 6시간 정도 더 달리고 나서야 우리는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에 도착했다. 라파즈의 버스터미널은 페루의 버스터미널보다도 작고 볼품없었지만, 우린 너무 오랜 시간동안 버스에 시달려 있었으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땅을 밟자마자 나는 온몸의 근육과 관절들을 풀기 시작했다. 도착한 시간은 벌써 오후 6시 정도, 저녁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저녁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터미널에서 바로 우유니 마을로 가는 버스표를 끊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황이었기에 별 생각 없이 눈에 바로 들어오는 버스 회사에 가서 표를 끊기로 했다. 세 군데 정도만 가격을 살펴보고 그 중에서 가장 저렴한 버스 회사로 가 바로 표를 끊었다. 2시간 뒤에 우유니로 가는 막차가 떠난다고 한다. 그 전에 저녁도 먹고 기왕 라파즈에 온 김에 주변을 둘러보기도 해야 했다. 표를 끊고 터미널로 나가서 바로 그 근처에 있는 튀김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간단하게 닭튀김과 빵 조금, 감자튀김을 시켜서 배를 채웠다. 음식이 조금 짜게 느껴졌지만 케첩을 듬뿍 발라 먹으니 괜찮았다. 무엇보다 우리는 너무 굶주려 있었고 너무 지쳐 있었다.

 

 

식당을 나서자 해는 저물고 라파즈 시내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터미널 위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시내로 흘러들어갔다. 라파즈의 야경은 쿠스코의 것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그 빼곡한 반짝거림이 더욱 압도적이었다. 한참 걸어 흐르는 강물 너머 다리를 건너고 시장 골목을 지나 높은 언덕 위 공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중에 듣고 보니 라파즈의 밤거리는 매우 위험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는 위험한지 안 한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정말 어떤 힘에 이끌리듯이 마구잡이로 밤거리를 걸었다. 그 낭만적인 분위기와 이국적인 풍경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지나다닌 길목과 건물들, 다리, 신호등 모든 것이 쉽게 잊히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아쉬운 2시간을 뒤로 하고 우유니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생각보다 좌석이 매우 편안했다. 이제 7시간 정도만 더 가면, 그토록 꿈에 그리던 우유니를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즈음이 바로 내 여행의 절반이 지나가는 지점일 것이다. 절반의 아쉬움과 절반의 설렘을 가슴에 품으며, 나는 라파즈를 떠나는 버스에서 다시 한 번 쏟아지는 은하수의 야경을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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