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서울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간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서울에 아버지쪽 친척들이 몇 분 사셨고, 명절 때였던가 아버지 손을 잡고 방문했었던 것이다. 그때도 죽산읍내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갔었다. 그리고 내린 곳은 용산터미널이었다.

마침 휴일이 되었다. 난 결국 용기를 냈다. 용산터미널행 직행 버스에 올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버스에 오른 사람들이 힐끗 힐끗 나를 바라보았다. 나이도 어리게 생긴 키작은 아이가 혼자서 서울행 버스를 타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난 애써 눈길을 피했다.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는 읍내를 빠져나가 확트인 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봄이 오는 들판이 휙휙 소리를 내며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갔다. 버스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가슴의 두근거림도 심해져갔다. 난생 처음 혼자서 서울에 간다고 생각하니 몹시 흥분이 되면서 한편으론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색다른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서울에 혼자 갔다가 낯선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산읍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어느덧 용인시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마침내 버스는 용인터미널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내렸다. 그리고 결국 나도 내리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붙잡혀 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너무 컸던 탓이다.

난 바로 죽산읍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지 않고 용인터미널 근처를 배회했다. 옷가게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중화요리집에서 풍기는 고소한 자장면 냄새를 맡기도 했다. 좀 전의 불안했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기분이 한껏 들떴다. 게다가 용인은 죽산읍에 비해선 훨씬 더 규모가 큰 도시였다.

그때였다. 내 눈에 들어온 아주 낯선 물건 하나. 길가에 놓여져 있는 공중전화였다. 그건 죽산읍에서도 단 한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공중전화인데, 왜 공중에 떠있지 않고 전봇대 기둥에 붙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 것이었다.

하루종일 용인 시내 이곳저곳을 걸어다니며 구경을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난 다시 터미널로 돌아왔다. 때마침 죽산행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올랐는데 마침 그 버스의 안내양이 눈에 익은 사람이 아닌가. 가만히 살펴보니 내 고향 당직골에 살던 누나였다.

 

 

나를 알아본 누나가 반갑게 웃으며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었다.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휴일이라 서울에 가보고 싶어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겁이 나 이곳 용인에 내렸고 이제 다시 돌아가는 길이라고 얘기했다. 누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다음에 또다시 서울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면 누나를 찾아 오라고 했다. 누나가 일하는 차를 타고 서울에 같이 올라가서 이곳저곳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누나는 차번호까지 일러주었다. 참 반갑고 고마웠다. 게다가 버스가 죽산읍에 도착하자 누나는 버스요금도 받지 않았다. 난 누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내 방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 누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야, 이제 나도 서울에 진짜로 갈 수 있겠구나."

죽산읍 이발소에서 일을 하는 동안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이발소 맞은 편 모퉁이에 위치한 중국음식점에서 자장면 배달을 하던 내 또래 아이였다. 이발소 주인장이 가끔 자장면을 주문하면 철가방을 들고 쏜살같이 이발소로 달려오던 그 친구와 친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발소에 손님이 없으면 주인장의 눈치를 본 뒤 그 친구에게 재빨리 뛰어가 자장면을 먹고 싶다고 하면 공짜로 내어줄 정도로 우리는 서로 친해졌다.

고향이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친구 역시 집을 나와 어렸을 적부터 타지에서 자장면 배달을 하며 끼니를 떼우고 있는 것이었다. 중국집 주방장을 겸했던 주인아저씨도 참 좋은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주방장 아저씨가 밀가루 반죽을 나무판에 탕탕 요란한 소리가 나게 때려가며 면발을 뽑아내는 모습을 자주 구경하기도 했다. 때리고 꼬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신기하게도 면발을 더 가늘게, 그리고 더 많이 불어나곤 했다.

하루는 그곳에 갔다가 주방장 아저씨가 없는 틈에 자장면발을 뽑아보겠다고 반죽을 떼어내 흉내를 내다가 걸린 일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 좋던 아저씨였는데 그때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호되게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내 친구에게도 자장면 만드는 기술을 절대 가르쳐주지 않고 있는데 엉뚱한 녀석이 들어와 함부로 밀가루 반죽을 만지고 있으니 혼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난 다시는 주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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