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에 일렁이는 내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시지요?
산들바람에 일렁이는 내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시지요?
  • 김초록 기자
  • 승인 2018.10.09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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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록 에세이> 억새가 사는 언덕

내가 태어난 곳은 조가비 같은 집들이 사이좋게 모여 있는 산마을이에요. 동쪽으로는 바다가 자란거리고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키 낮은 산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곳. 가을 깊은 이맘때쯤이면 골골이 물감을 칠해놓은 듯 아름답지요. 산자락을 붉고 노랗게 물들인 단풍하며 감나무마다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허수아비가 부지런히 참새를 쫓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지요.

골안마을 사람들은 양처럼 순하고 개미처럼 부지런하답니다. 올해도 풍년을 일군 마을 사람들의 표정은 보름달처럼 환했어요. 마을 뒤편으로는 전교생이 스무 명 남짓한 분교가 있답니다.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아침 체조를 하는 아이들. 나뭇가지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기 참새들이 약속이나 한 듯 포르르 날아오르는 풍경하며. 분교를 둘러싼 울타리로는 코스모스며 해바라기가 실바람에 출렁거리고.

 

 

내가 사는 둔덕에서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지요. 바람 없는 날은 툭, 툭 알밤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는 걸요. 밤나무에 올라가 알밤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다람쥐도 보이고요. 가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랍니다. 산들바람에 일렁이는 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들 아시지요? 요즘 들어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어요. 잔바람에 하얗게 나부끼는 내 모습을 보고는 하나같이 감탄을 늘어놓지요.

“야, 정말 환상적이군. 멋진 풍경이야.”

나는 억새 중에서도 참억새이지요. 주로 산등성이나 밭두둑에 모여 자라는데, 키는 2미터 정도이고 한여름부터 이른 가을에 걸쳐 이삭이 나지요. 늦가을쯤에 옅은 자줏빛을 띤 희고 보송보송한 잔꽃을 피운답니다.

논두렁이나 강변에 사는 물억새도 있지만 대개는 뭉뚱그려 ‘억새’라고 부르지요. 뿌리는 땅 속에 단단히 박혀 있어서 여간해서는 뽑히지 않고 메마른 들판이나 산불이 났던 공터 같은 곳에서도 잘 자라지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억세게 자란다고 해서 ‘억새’라는 이름이 붙었다지 뭐예요. 여기서 잠깐! 나를 만질 때는 조심해야 해요. 미끈한 줄기와 활시위처럼 휘어진 잎사귀에 자칫하면 손을 벨 수도 있거든요.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 내가 등장하는 가사가 있지요.

‘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

한 번 불러보고 싶다고요? 여기서 으악새는 나를 가리킨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으악새가 억새의 사투리라는 것을 모르고 ‘새’로 착각하기 일쑤이지요. 그럴 수밖에요. ‘으악새’란 말 다음에 ‘우는’이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으악새가 운다는 것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휩쓸리는 소리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가을 분위기를 이처럼 잘 표현한 노랫말도 드물 거예요.

나와 비슷한 식물 중에 갈대가 있어요. 내 친구 갈대는 주로 물가에 숲을 이루고 살지요. 이삭이 빗자루처럼 생기고 속이 비어 있으며 줄기가 굵고 키도 나보다 훨씬 크고요, 가을에 솜털 같은 꽃이 피지요.

이런 특징에도 불구하고 나를 갈대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답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보고 즐길 줄만 알았지 성장에 대해서는 통 관심이 없나 봐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다 거짓말이었어요.

며칠 전 저녁나절이었어요. 아랫마을에 사는 청년이 사내아이를 데리고 나를 보러 왔지 뭐예요.

아이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소리치는 것이었어요.

“삼촌, 억새 좀 봐. 너무 멋있어요.”

“돌아, 저건 억새가 아니고 갈대라고 하는 거야.”

“아닌데…. 억새는 줄기가 얇고 키가 작다고 배웠는데…. 그리고 갈대는 강가나 호숫가에 살지만 억새는 둔덕이나 산등성이에서 자란다고 했어요.”

“그걸 누구한테 배웠니?”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어요.”

“삼촌이 돌이한테 한 가지 배웠는걸!”

청년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렸어요. 아이가 청년을 가르쳐준 격이 되고 말았지요. 나는 그 아이가 마음에 쏙 들었어요. 아이는 기분이 좋은 지 내 곁을 깡총깡총 뛰어 다녔어요. 나는 그 아이한테 속삭이듯 말했어요.

“고마워. 넌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어.”

나는 연신 불어대는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렸어요. 아이는 추운 지 내 곁에 바짝 다가앉았어요.

“억새야. 나는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돌이라고 해. 너를 만나서 무척 반가워. 나는 너를 금방 알아보았단다. 담임선생님께서 억새와 갈대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거든. 내일도 너를 꼭 보러 올 거야.”

나는 아이의 볼에 내 부드러운 꽃 이삭을 살짝 스쳤어요. 아이는 간지러운지 손으로 얼른 나를 밀쳐냈어요.

“돌아, 그 앞에 서 봐라. 삼촌이 사진 찍어 줄께.”

아이는 내 앞에 서서 폼을 잡았어요.

“자, 앞을 보고 웃어봐.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

나는 아이와 함께 한 장의 사진에 담겼어요. 날이 저물자 두 사람은 내 곁을 떠났어요. 그리움을 남긴 채. 나는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어요. 저 멀리 산등성이로 저녁노을이 번져들고 있었어요.

가을이 깊었어요.

겨울이 오기 전에 할 일이 남아 있어요. 그게 뭐냐고요? 봄이 오면 많은 싹이 나올 수 있도록 사방에 내 씨를 퍼트리는 것이지요. 그래야 내 모습을 두고두고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에요.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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