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만 열면 언제나 구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문만 열면 언제나 구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8.10.12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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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문을 열면,
  구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름처럼 애매한 단어가 좋아
  당신이 사슴이라고 읽으면 재주를 넘지 않아도 사슴으로 변하고
  당신이 슬프다고 말하면 동공이 사라진 짐승의 몸을 어루만지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아무래도 나는 나에게서 자꾸만 멀어져
  코트 자락에 남은 옛날의 어느 저녁이
  사라지지 않는 저녁이
  기억나지 않는다
  명사를 잊어가는 노인의 싸늘한 손처럼
  오직 떨림만
  흔들리는 온도만

  단수와 만난 단수는 복수가 된다
  단수와 헤어진 단수는 여전히 단수다
  그러니 아무것도 잃은 것은 없다
  구름과 어제가 지나갔을 뿐
  
  구름과 함께 걷는 길, 나는 두 몸 같은, 세 몸 같은 꿈에 잠긴다
  코끼리의 외로운 보폭을 가늠하는 꿈
  낮잠에서 깨어난 어른이 소년처럼 우는 꿈
  또는 순례자의 얕은 꿈을 걱정한다고 해도 괜찮겠지
  여기가 아닌 어딘가라는 말도 괜찮겠지

  괜찮다는 말, 나를 끌고 가는 구름에 대한 해석
  비로소 잃어버린 명사들과 제대로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잠에서 깨면 모호한 당신이라는 말,
  여전히 머리맡을 서성거린다

  문을 열면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구름처럼

  김선재, <여기가 아닌 어딘가>, 《얼룩의 탄생》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언가 가득 들어차 있을 수 있을까? 모순은 쉽게 엉터리로 치부되고 말지만, 모순이야말로 진정 신비 그 자체다. 모순적인 표현들은 어떤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주곤 한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세계와는 다른, 간략히 말하자면 판타지. 시는 이런 판타지를 껴안고 있다. 얼마나 그 여러 세계들 사이의 경계를 잘 넘나드느냐의 문제는 늘 시에 있어서 제기되어 왔다. 역설적인 말들과 문장들은 시를 돋보이게끔 하면서도 동시에 시를 엉터리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그 엉터리를 읽고 있다. 그러나 그 엉터리 안에 가득 들어찬 이야기와 사물들이 보이는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언가 가득 들어차 있을 수 있다. 이 확신에 찬 대답은 과학적이지도 건설적이지도 못하지만, 새로운 세계에 한 번 발을 내디뎌본 사람은 알 수 있다. 그 세계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라는 것을.

김선재의 시는 스스로가 판타지라는 것을 명백하게 선언한다. 그리고 그 판타지라는 것이 이야깃거리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임을 발견할 수 있다. 구름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애매함에 집중하는 흐름을 보라. 판타지 속에서 질서를 세우고, 곡선이 꼭 직선 흉내를 낸다. 모순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언들이 오히려 김선재의 문장들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녀의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모순의 세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느낀다. 모순은 모순을 넘어 더 깊이 있는 모순을 직면하게 되고, 결국 그 조각들의 질서가 이야기를 만든다. 시선과 흐름에서 시작된 모순의 범람이 천천히 이야기로서의 판타지라는 궁극의 지점에 도달하는 과정이 시 전체에 선연하다.

 

▲ 사진=pixabay.com

 

모순의 세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라짐과 멀어짐뿐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주는 감정은 강렬하다. 분노, 두려움, 슬픔 같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상태가 아니다. 떨리지만 싸늘하고, 흔들리지만 온도가 남아있다. 그렇게 느껴지는 감정을 무엇이라고 정의 내려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분명 그 느낌, 그 감정의 파도가 사라짐과 멀어짐이라는 운동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텅 비어 있을 것만 같은 무채색의 세계인 패러독스 안에 김선재 시인은 철저하게 자신만의 색깔을 채워 넣고 있다. 그 색깔들이 모순의 울타리 내부를 가득 채울 때 비로소 그녀의 세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얼핏 무의미의 향연인 것처럼 보이는 단어들이 모여서 더 큰 세계를 지향한다. 무의미가 의미 있어지는 순간이며, 그 의미들은 논리를 포기함으로써 무의미로 돌아간다. 이런 순환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은 시인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감정이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 묵직하게 어떤 힘을 내는 그 감정은 시인의 세계에서 중심을 맡고 있다.

‘세계’라는 말로써 계속 김선재 시인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시인이 시 속에서 드러내는 ‘공간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문을 열고 생겨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서 끊임없이 파생되는 공간들, 이를테면 ‘구름과 함께 걷는 길’이라던가 아니면 무한한 공간인 ‘꿈’을 넘나들며 벗어나지 못한다. 그 공간들에 대한 애착이 사라짐과 멀어짐이라는 운동을 불러일으키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의 힘들로 공간을 가득 채운다. 시인에게 공간이란 단순히 비어있는 어떤 곳에 불과하지 않고, 상상력과 감정들의 바탕으로 작용하니 ‘세계’라는 말이 그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모호한 단어가 곧 ‘세계’다. 시에서 말하듯이, 애매한 단어에서 시작된 일련의 움직임들이 모호한 말로써 끝맺음하는 것이다. 결국 애매모호함의 사이에 모순이 있고, 판타지가 있으며, 운동이 있고, 감정이 있다. 김선재 시인의 시는 이처럼 처음과 끝이 분명하고, 그 안의 체계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구름을 보고 떠올린 당신만으로도 그녀는 수많은 공간과 방을 만들어 낼 줄 아는 타고난 설계자다. 잘 다듬어진 시인의 문장을 몇 번씩 곱씹어 보아도, 그 세계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문을 열 수가 없다. 문을 열면 언제나 구름이 기다리는데도. 그 문을 열려면 이해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체계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그 시스템 안에 한 번 들어가 보면 된다. 시인의 세계가 견고해보이지만, 실은 그 내부에 들어차 있는 것은 감정의 복합물들이다. 그러니 문만 열면 된다. 문만 열면, 언제나 구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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