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미투’ 비난은 파렴치한 일이다
‘익명 미투’ 비난은 파렴치한 일이다
  • 이석원 기자
  • 승인 2018.10.17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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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기획>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살아보기 / 이석원
▲ 밀레니엄 :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폭력을 다른 스웨덴의 베스트셀러 소설.

요즘은 한국에서 ‘미투(Me too)’ 운동이 조금은 잠잠해지는 분위기다. 물론 최근에는 개인적인 폭로의 성격이 강했던 ‘미투’가 ‘혜화역 집회’로 통칭되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미투’ 운동으로 확산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처음 고은이나 이윤택, 조재현이나 조민기 등등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던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미투’ 운동이 여성과 남성간의 성 대결 양상으로 옮겨간 것도 달라진 분위기에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워마드’로 대표되는 남성 혐오가 여성과 남성의 성 대결의 첨병으로 인식되면서 ‘미투’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미투’가 불편한 사람들은 또 그 사람들대로 ‘가능하면 입을 다물고 더 떠들지 말자’는 듯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투’가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의 ‘충격적인 폭로’가 없다는 것 아닐까?

한국에서 ‘미투’는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이름도 공개하면서 폭로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있다. 몇몇 여성들이 익명성을 가지고 ‘미투’를 했더니 “왜 익명이냐? ‘미투’는 자신을 드러내는 희생을 감내하고라도 바로잡겠다는 게 원래 취지 아니냐?”는 얼토당토않은 주장들을 하기도 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겠으면 ’미투‘를 하면 안된다는 논리다. 이 또한 폭력이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성 평등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다. 여성의 경제 참여도 가장 높고, 의회나 정부에도 여성의 자리는 남성의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가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가사든 육아든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거의 동등하다.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남성의 가사 노동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한마디로 스웨덴은 양성평등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스웨덴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스웨덴도 불과 40∼50년 전에는 여성들이 학대받는 나라였다. 여성의 인격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지 않았다. 여성은 철저히 남성에게 예속된 존재이고, 남성은 여성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40∼50년 전까지 갈 것도 없다. 불과 10여 년 전에도 스웨덴에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각종 범죄가 적지 않았다. 스웨덴 최고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스티그 라르손의 연작 소설 ‘밀레니엄’은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범죄를 그리고 있다.

이 책 제1부의 제목이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원제 : Man som hatar kvinnor)’인데, 각 장마다 붙은 코멘트는 ‘스웨덴 여성의 18퍼센트는 살아오면서 한 번 이상 남성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 ‘스웨덴 여성 중 46퍼센트가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스웨덴 여성 중 13퍼센트는 심각한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스웨덴에서 성폭행을 당한 여성 중 92%는 고소하지 않았다’이다. 이 소설은 2004년의 상황을 그린 것이다.

스웨덴 여성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무단히 노력하고 투쟁해서 현재의 위상을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스웨덴 여성들의 인권을 위한 투쟁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 스웨덴 여성 ; 스웨덴 여성들이 현재의 위상을 갖는 데는 50여년 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래서 스웨덴에도 ‘미투’가 있다. 심지어 스웨덴의 가장 유명한 ‘미투’는 스웨덴 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스웨덴 ‘미투’는 노벨문학상의 중단까지 가져왔기 때문이다. 가히 범세계적인 파급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스웨덴의 ‘미투’이 경우 한국이나 다른 나라들의 ‘미투’와 확연히 다른 것이 있다. 익명성이다. 스웨덴의 ‘미투’는 익명성을 전제로 한다. ‘미투’를 선언하는 여성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문제 또한 순전히 본인의 의지다.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서 폭로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거나, 진실이 축소되지 않는다.

최근 한국을 방문 중인, 배우이자 스웨덴 ‘미투’ 운동을 이끄는 수잔나 딜버 스웨덴 공연예술연맹 배우 부문 이사회 의장은 이런 말을 했다. “스웨덴 '미투' 운동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익명으로 진행됐다”고. 그러면서 그는 신분의 노출 여부가 ‘미투’의 진솔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는 한국의 상황에 의아해 했다.

지난 8월 4일 스톡홀름에서 열린 동성애 축제인 ‘유로 프라이드 2018’ 현장에서 만난 스웨덴 대학생 밀레나 홀름은 “내 주변에 ‘미투’ 선언을 한 친구가 3명이 있는데, 그들은 아무도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다”며 “하지만 그들의 폭로를 접한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이 덜 용감하다고 얘기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미투’는 마치 홀로코스트와 같은 느낌이다. 홀로코스트가 불과 몇 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범죄라면, 여성에 대한 폭력은 지난 2000년 이상의 시간동안 전 세계의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가한 범죄다. ‘미투’는 남성의 입장에서는 가해 경험이 있든 없든 불편할 수 있지만, ‘상대방이 이제는 됐다고 할 때까지 계속 사과를 해야 하는’ 일이다. 마치 전후 역대 독일의 총리들이 그렇게 해왔듯이.

‘워마드’를 핑계로 ‘혜화역 집회’를 폄하하려는 것도 비겁하다. 그들의 마스크 쓴 얼굴을 향해 ‘비겁하다’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더욱 편협하다. 익명으로 ‘미투’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파렴치하다. 일본이 우리에게 하는 짓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스웨덴에서도 스웨덴민주당을 위시로 한 극우세력들 중 상당수는 여성의 사회 진출, 경제 참여에 불편한 소리를 낸다. ‘미투’를 평가절하하고, 여성의 남성의 적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스웨덴은 여성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라는 말을 듣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하지만 스웨덴의 ‘미투’가 한국의 ‘미투’와 다른 것은 상식을 가진 대중 일반들이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지난 20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남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가했던 폭력에 대한 반성이다. 그래서 아직 여성과 남성이 다소 대립하는 듯한 지금 이 시대의 갈등을 더 빨리 끝내고, 여성과 남성이 아닌 그냥 사람으로서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희구하려는 것이다.

 

<이석원 님은 한국에서 언론인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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