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가을날 탑골공원 풍경 스케치


일교차가 커진 가을의 한가운데다. 아직 낮엔 햇살이 따뜻해 활동하기 좋다. 이맘때면 할머니, 할아버지,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등산을 가거나 단풍구경 다니시는 걸 많이 볼 수 있다. 65세 이상부터는 지하철 무임승차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제 등산가기도 힘드신 어르신들은 시간은 많고 할 게 없어 그들만의 장소로 모이게 된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탑골공원이다. 가을 단풍이 한창인 가을날 탑골공원을 찾았다.

탑골공원은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 탑골공원으로 지정됐다. 서울에 최초로 만들어진 근대식 공원이다.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에 조성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공원은 고종 연간 총세무사로 활약한 브라운의 건의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개장 당시에는 빈 땅에 울타리를 둘러 나무를 심고 의자를 놓은 정도였으나 1910년부터 점차 시설물을 늘려갔으며, 1913년부터는 매일 개방했다. 탑골공원은 3.1독립운동의 점화지로 잘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1일, 4000~5000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정오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이곳의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여기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79년 3.1독립운동 60주년을 맞아 공원을 정비해 넓혔다. 이 일대는 세조때 세운 원각사 터로 현재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남아 있고, 3.1운동을 기념한 독립운동 부조판과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있다.

 

 

종로 3가역 1번 출구로 나와 인사동 방면으로 주욱 걷는다. 메타세콰이어 낙엽들이 떨어져 바람에 날린다. 평일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분주한 발걸음으로 돌아다닌다. 회사원도, 다정한 모녀도, 기타를 메고 있는 남자도,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총집결돼있다. 그 중 느린 걸음의 할아버지들이 가장 많이 보인다. 그들은 전부 한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탑골공원 입구는 항상 분주하다. 이날은 ‘영토회복서명대’가 놓여있다. 영토회복국민본부에서 나왔단다. ‘왼쪽발 대마도 반환하라’ ‘심장 만주간도 반환하라’ ‘오른쪽 팔 연해주 반환하라’는 등의 글귀가 눈길을 끈다. 할아버지 한분과 그의 사진을 찍던 다른 할아버지 한 분이 담소를 나눈다.

 

 

파출소 바로 옆 탑골공원 정문의 ‘삼일문’이라고 커다랗게 적힌 한글 간판이 눈길을 끈다. 안으로 들어간다. 이름 그대로 공원이다. 한적하고 고요하다. 어르신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계단과 의자, 팔각정 등 앉을 수 있는 자리면 전부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눈감고 바람에 부딪히는 낙엽의 소리를 듣거나,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가을하늘을 바라보거나, 멍하니 공원 안을 구경하고 계신다. 공원 안은 새소리, 바람소리, 대로변의 차 지나다니는 소리로 가득하다.

대원각사비 앞에서 외국인 노부부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깜짝 놀랄 광경이 펼쳐진다. 연세가 꽤 많이 돼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외국인 노부부에게 다가가 말을 걸더니 유창하게 대원각사비에 대해 소개를 해주신다. 그것도 영어로. 발음도 꽤 좋다. 한국어로 설명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이미 할아버지는 대원각사비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저 기념사진만 찍고 넘어갔을 법한 외국인 노부부는 할아버지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무척 감동받은 모습이다. 자처해 열심히 가이드를 해주시는 할아버지가 참으로 멋있게 보였다.

 

 

팔각정에는 따뜻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계시는 분들이 많았다. 공원 안을 슬금슬금 걷는 어르신들도 많이 보였다. 간혹 보이는 여학생들과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근처에 왔다가 잠시 들른 모양이다. 울긋불긋 물든 단풍도 구경하고 바스락 거리는 낙엽 위를 걷는 모습이 참 여유로워 보인다.

탑골공원 밖으로 나간다. 공원을 에워싸고 있는 주변 길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탑골공원 앞에선 바르게살기운동 종로구협의회 주최로 ‘차상위 계층 바른 청소년 장학금 마련 헌옷 판매 행사’가 열리고 있다. 큰 대로변에 유동인구가 많아서 지나는 사람들이 관심 있게 봤다.

 

 

담을 따라 쭉 뒤편으로 가다보니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가 나온다. 요즘 핫플레이스인 모양이다. 장기판이 한창이다. 간이의자와 장기판만 있으면 어떤 장소건 불꽃 튀기는 현장이 된다. 장기를 두는 곳마다 이를 보기 위해 둘러싼 어르신들이 만원이다.

좀 더 들어가보니 탑골공원을 찾은 분들을 위한 맞춤 상권이 펼쳐진다. 먼저 200원 짜리 커피자판기. 쌀쌀한 날씨, 장기 구경을 하는 중간 뜨끈한 자판기 커피 한잔 마시면 비싼 카페 저리가라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죄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있는 걸 보니 200원짜리 커피자판기의 위용이 실감난다.

 

 

이용원들도 눈길을 끈다. 이발 가격이 고작 4000원, 염색은 5000원 밖에 하지 않는다. 한 서너 군데는 넘는 것 같다. 탑골공원을 찾는 분들은 대부분 어르신들. 바람 쐬러 나왔다가 아주 싼 가격에 이발도 하고 염색도 하고, 일거삼득 아니겠는가.

탑골공원 안팎을 둘러보고 나니 왜 많은 어르신들이 이곳을 찾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령화시대지만 어르신들이 갈 곳, 즐길 것은 너무나 적다. 집에 있기엔 적적하고, 일할 자리는 없고, 돈도 넉넉지 않고. 그나마 이렇게라도 모여 장기 두고, 200원 짜리 자판기 커피나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며 하루를 소일하는 게 일상인 것이다. 언젠가 찾아올 모두의 미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언제 실현될까. 추운 겨울이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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