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을은 흔히들 단풍의 계절이요 국화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내게는 모과의 계절이요 첫사랑의 계절이다. 모과향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내 생애 최초로 연정을 느꼈던 그녀가 생각나고, 그녀를 생각하노라면 모과향이 느껴지는 것이니, 인간이란 역시 추억을 먹고사는 동물이구나 싶기도 하다.

 

▲ 다 떨어지고 달랑 하나 남은 모과

 

가을이면 우리 집안 구석구석 도처에서 모과향이 흐른다. 정말로 그것은, 코로 냄새가 맡아지는 게 아니라 흐른다는 느낌이다. 어디에 서 있으면 전혀 느껴지지 않던 냄새가, 다른 어디에 서 있을라치면 몸으로 가만히 느껴지는 것이니, 향기는 역시 어느 한 곳에 붙박이로 정착한 게 아니라 흐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흐르는 향기를 몸이 감지하는 순간의 느낌이란 마치 연기가 피어오를 때의 그것과도 같아서, 마음이 바쁘거나 들떠 있을 때는 거기 어디에 향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어렵지만, 마음이 내 삶의 근원 같은 것을 어렴풋이나마 그리워하고 있을 때, 이를테면 돌아가신 어머니를 잠깐이나마 떠올렸다든가 하는 그런 날은 굳이 찾고자 하지 않아도 대번에 그 향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그 향을 능동적으로 느낀 게 아니라 그 향이 나를 잡아 세워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저기까지, 걸어가고자 했던 나는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게 뭐지? 하고, 그렇게 코를 살며시 벌름거리면 그것이, 모과향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는 향기가 어느새 내 안으로 깊이 들어와서 돌아다닌다는 느낌이 온다.

그렇다. 그 향기는 내가 자발적으로 느낀 게 아니다. 그가, 그 향기가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의 모든 것을 깨워놓으면, 그때 나는 비로소 그것을, 그 향기를 느끼는 것일 뿐이다. 이때의 느낌은 벌 나비를 부르는 꽃향기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어서, 느껴짐과 동시에 두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뭘 찾는 게 아니라 두 눈이 저절로 그냥 살포시 감겨지는 것이니, 그때부터 나는 현실 속의 내가 아닌 다른 공간 속의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 멋대로 뒹구는 모과

 

다른 존재,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당연히 나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설레고, 설레기 때문에 풍성한 그 무엇인가 이를테면 미증유의 희망 같은 것이라도 가슴에 한가득 품고 있고 것만 같은 것이니, 지구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가장 상투적인 표현을 쓰기로 하자면 행복한, 행복해 하는 남자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나는 현실을 잊고 추억을 더듬어 들어간다.

가다 보면 거기 어디에 그녀가 있다. 살포시 눈을 감고, 모과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조심조심 과거를 더듬어 가고 있노라면 안타까운 표정으로 슬프게 미소 짓고 있는 그녀를 만나게 된다. 너무도 어렸던 시절에 나의 애인이었던, 선생님이면서 제자이기도 했던 그녀를 나는 이제 잊고 싶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꾸 더 생각나는 까닭은 또 무엇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직 어른이 못 된다 해서 미성년으로 분류되던 시절에, 고종사촌 누나도 역시 아직 미성이건만 시집을 가고 말았다. 누나 자신이 원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다. 가난한 살림에 입이라도 하나 던다고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결혼이었으니, 갔다기보다는 보내졌다고 해야 바른 표현일 것이다.

완고한 고모부는 누나를 학교에도 안 보냈다. 매달 얼마씩 납부해야 하는 기성회비와 책값 등등을 감당하기 어려워서였다. 어쩌면 고분고분 말도 잘 듣고, 집안일도 잘하는 소중한 노동자원을 학교 따위에 바치고 싶지 않았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집불통으로 소문난 고모부도 거세게 불어오는 시류를 비켜갈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주위의 손가락질이 무서워서였는지도 모른다.

 

▲ 비바람에 떨어진 모과

 

아무튼 누나는 뒤늦게 학교에 입학을 했고, 나의 후배 아니 제자가 되었다. 나는 바야흐로 신명이 났다. 내가 아는 것을 누나는 아직 모르고, 누나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내게 물어오고 있었으니, 나는 누나를 학교의 선생님처럼 무섭게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소명의식에 들떠 있었다.

“바보야 이것도 몰라?”

그 시기에 나는 아마 하루에도 몇 번씩, 어쩌면 수십 수백 번씩 그런 지청구를 누나에게 했을 것이다. 누나의 반응은 오직 하나였다.

“미안해.”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누나가 나는 귀여웠다. 울음이 살짝 묻어나는 목소리로, 미안해, 하면서 눈을 깜빡깜빡하다가 고개를 수그리는 그 모습이, 그냥 확 달려들어서 어딘가를 마구 깨물어대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것은 실로, 완전히 새로운 발견이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누나는 사실 나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도 무섭고 지겹고 까탈스런 도덕 선생이어서, 사람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나무라는, 가능한 한 피해 다니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렇게도 어렵던 선생님이 내 말 한 마디에 미안해, 하며 금방 울 것 같은 모습을 보이니, 나로서는 그 모습이 그렇게도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랬다. 나는 동생 앞에서 쩔쩔매는 누나의 모습에 의기양양 같은 것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이었던 누나가 내 말 한 마디에 울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면 당연히 의기양양해야겠지만, 나는 의기양양이 아닌 귀여움을 보고 있었던 것이니, 일언이 폐지하고 그것은 이성이 이성에게서 느끼는 일종의 연정 즉 내 인생의 첫사랑이었던 셈이다.

 

▲ 모과 꽃

 

물론 그때 당시에는 그런 생각 같은 것은 해보지도 못했다. 내가 누나를 친족간의 관념적인 사랑이 아닌 시퍼렇게 펄펄 끓는 이성의 입장에서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누나의 결혼 얘기를 들은 뒤였다. 누나가 어찌어찌 이상한 경로를 거쳐 시집을 가기로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을 때, 그때 나는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망이라는 것을 체험했을 것이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뭔가를 해볼 수 있다면 절망이고 뭐고 느낄 이유도 겨를도 없었겠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만 봐야 한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란 것은 마치 거대한 바위가 등허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겨우, 간신히 손가락이나 까딱, 까딱하고 있을 뿐인 것이었다.

누나는 풀처럼 여리고 꽃처럼 향기로운 사람, 아니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근본도 족보도 모르는 사내의 아내가 된다고 했을 때 나는 그 결혼식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매형이라는 작자가 우리 집에 인사를 왔을 때는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그 앞에서 달팍 넘어지는 방식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내 인생은 비루하게 끝나버리는 것 같았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 내게도 보람차게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누나의 시집살이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누나가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시아비의 품성에 관한 소문이 매우 안 좋았다. 며느리가 들에 나가서 일을 할 생각은 안 하고 집안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반찬 만드는 것밖에 모른다고, 명색이 시아비라는 작자가 누나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질질 끌어서 논고랑창에 처박아 놓기를 여반장으로 해댄다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그런 놈의 영감태기가 다 있나 몰러-어?”

 

▲ 도처에 모과

 

입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한 마디씩 했다. 모두가 말뿐이었다. 쫓아가서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나서리라. 조선낫을 들고 쫓아가서 영감태기의 손모가지를 확 잘라버리겠노라고, 나는 그렇게 결심을 했고,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호언장담까지 했지만, 나 또한 말뿐이었다. 조선낫을 숫돌에 쓱싹쓱싹 갈아대기만 했을 뿐으로, 차마 그것을 들고 집을 나서는 용기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비분강개의 나날을 며칠이나 보낸 끝에 결국 조선낫은 포기하고 말았다. 포기하고 나니 그렇게도 억울하고 분할 수가 없었다. 분한 마음에 맨손으로 그냥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돌멩이 몇 개를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멀리서 돌멩이로 영감태기의 뒤통수라도 깨트려놓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누나의 시집살이가 자심한 그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나를 사로잡은 것이 바로 그것, 모과였다. 가을바람이 심하게 불고 난 뒤끝이라서인지 열매가 잔뜩 떨어져 있었고, 특유의 향기가 나를 취하게 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울퉁불퉁 제멋대로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향기는 기가 막히다. 그런 신기한 열매를 나는 우리 마을 어느 집에서도 본 적이 없었고, 학교를 다닐 때 거쳐 가는 마을 어디에서도 그런 기막힌 향기를 뿜어내는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누나가 시집살이로 고생하고 있는 그 마을에는 유난스럽게도 거의 집집마다 모과나무가 있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접하는 모과 향에 취한 나는 영감태기를 벌하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주머니 속의 돌멩이를 죄다 꺼내서 버리고 모과를 주워 담고 있었다.

 

▲ 여기도 모과
▲ 저기도 모과

 

지금 생각하면 기도 안 막힐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세상에 무슨 이런 희한한 열매가 다 있는가 싶었고, 아무도 모르는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만 같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긴 어쩌면 의도적인 정신없음이었다고 말해야 옳은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누나의 혹독한 시집살이를 철부지 소년 따위가 어떻게 해볼 수 있으랴, 하는 체념이 내 마음의 어딘가에서 꿈틀거리고 있다가 모과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탈출구로 삼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어쨌든 그 뒤로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다. 철부지 소년은 어느새 중년에 이르렀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 이사를 와서 이것저것 나무를 사다가 심을 때 모과 묘목을 빠트리지 않고 세 그루나 심었으니, 까닭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굳이 묻기라도 한다면 나는 아마 그 시절의 누나를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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