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소멸하는 약력은
  나도 부러웠다

  풀 죽은 슬픔이
  여는 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따라올라가면
  은어가 하루처럼 많던 날들이 나온다

  저녁 강의 시야(視野)가 그랬다
  출발은 하겠는데 계속 돌아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강변에서는
  공중에서 죽은 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땅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새의 영혼들이

  해를 등지고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보는 저녁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은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박준, <저녁-금강>,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예전에 한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박준 시인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그러자 그 시인이 그랬다. 박준 시인, 거의 시인 중에서는 아이돌이지. 정말 아이돌 가수가 데뷔하듯이 순식간에 인기를 끌며 등장한 박준 시인, 그렇다고 그런 이유만으로 그를 아이돌이라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정말 아이돌인 이유는 그의 시에 있다. 가장 시인들이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것들에 대해 그는 쓴다. 전형과 익숙함 사이에 날카로운 문장들을 집어넣고 마저 벼리지 못한 감정을 다듬어 내놓는다. 그는 그만큼 숙련된 시인이고, 그렇기에 그의 시는 아무리 다시 읽어도 지겹지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박준 시인을 사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조현병과 불면증의 중간쯤인 요즘 시들의 행보 중에서 박준의 시는 시의 시대가 풍미하던 옛날을 향수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옛날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나름의 실험을 문장 위에서 조심스럽게 해나가는데, 그 노력이야말로 그의 시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 사진=pixabay.com

 

그의 실험이 천재적이거나 위대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의 문장력 덕분이다. 그의 문장들은 늘 겸손하다. 달리 말하자면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렇다고 그의 문장에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 연만 들여다보자. ‘소멸하는 약력’이라는 단어와 수식어는 묵직하고 힘이 있다. 일단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고 추상적이다. 이로부터 박준의 시상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야기되지는 않을까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걱정임을 우린 금방 알 수 있다. 그 ‘소멸하는 약력’의 거창함을 받아주는 문장이란 고작 ‘나도 부러웠다’라는 지나치게 솔직하고 어떻게 보면 단순해 보이는 마음에 불과하다. 거대한 관념을 들여다보면서도 그것을 궁금해 하거나 그것에 의해 괴로워하기보다, 그 관념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막연히 느껴지는 어떤 상실감을 마음이 마음으로서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잡함에서 시작된 시의 구절들이 천천히 간단함과 단순함의 단계로 흘러간다. 복잡함의 우물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걸 넘어서서 다른 풍경과 이어지고 다른 개념과 다른 시간, 다른 감정들을 연결한다.

그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서 그려내는 저녁과 강은 그 주변의 모든 것들을 이어나간다. 저녁은 애초에 강과 이어져 있고, 강은 땅으로, 땅은 공중으로, 공중은 새로, 새는 영혼으로, 영혼은 해로, 지는 해는 다시 저녁으로. 시상과 시상들이 연결되면서 하나의 시는 다시 하나의 순간, 하나의 기억과 기록으로 남는다. 이런 모든 순환은 다시 고요함이라는 현상과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겹쳐지면서 첫 연 첫 행의 ‘소멸하는 약력’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단순히 저녁의 시작을 금강에서 바라보았던 것이 아니라, 영혼과 시간 그리고 공간의 소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시 같은 색 한 점이 되어 사라지는 때,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낳는 저녁이 강 저편으로 등장한다.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이유는 약력의 소멸에 있다. 우리의 약력이 강 귀퉁이의 한 점으로 소멸되어 가는데, 우리는 우리의 존재 이유도 우리의 삶과 사명에 대해서도 전혀 알 필요가 없다. 약력대로 살다가 소멸되면 된다. 오히려 소멸되는 약력은 우리가 우리의 삶과 사명을 다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순간을 부러워한다. 소리를 잃으면 갑자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다. 그것이야말로 소멸이 단계를 밟는 신호탄이니까.

그 소멸의 과정 한 가운데에는 ‘당신’이 있다. 박준의 ‘당신’은 항상 그의 시를 애절하게 만든다. 당신이 떠올랐기 때문에, 당신의 얼굴이 물에 비쳤기 때문에, 그 강가는 당신을 기억하며 기록하는 장소로 변화한다. 소멸의 시간은 당신을 잊고 다음 생을 기약하게끔 하는 종착역이자 시발점으로 변화한다. 이해하기 어렵고 추상적인 시상들이 천천히 ‘당신’의 주위로 몰린다. 그렇기에 우리가 익숙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준의 시를 읽는 우리 역시 익숙하게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당신을 추억하고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우리도 모르게 시인이 만들어낸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 그리고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힘에 매료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박준 시인을 아이돌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그의 시는 아이돌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오히려 8-90년대 노래를 듣는 기분이랄까. 문득 무슨 생각에 잠기게 하면서도 그 생각의 깊이가 너무 깊지는 않다. 사랑하고, 사랑했던,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읽기에 정말 절절한 시가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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