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유대칠 칼럼

삶은 쉽지 않다. 참 어렵다. 수 억 년을 기다리다 이제 나의 차례가 되어 이렇게 생명을 받아 존재하게 되었는데, 이 삶은 전쟁터다. 학교와 학원에선 싸우는 법을 알려준다. 시험을 치고 나의 전투력에 따라서 사람들은 나를 어느 대학 어느 학과라고 나를 분류한다. 그리고 웬만큼 노력해도 그때 정해진 시선은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비슷한 전투력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시 다툼이 생긴다. 취업을 위한 다툼이다. 이렇게 삶은 쉽지 않다. 다툼은 쉼이 없고, 그 다툼에서 나의 것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행복했다고 이야기들 한다. 행복은 타자를 이기고 얻는 승리감이다. 누군가의 아픔이 내 행복의 이유다. 내가 패배자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기뻐하고, 패배의 불행을 보며 나의 우월함을 확인한다. 참 못된 행복이다. 그런 행복이 있는 이 삶은 참 쉽지 않다. 무척이나 어렵다.

그렇게 중요한 ‘나의 것’과 ‘너의 것’이 정말 ‘나의 것’이고 정말 ‘너의 것’인가? 가만히 생각하면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온전히 ‘나의 것’이기만 한 것도 없고 온전히 ‘너의 것’이기만 한 것도 없다. ‘나의 것’이라 붙잡고 살지만 ‘나’란 존재 자체가 이 땅에 온지 오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래지 않을 삶을 살다 사라질 존재다. 찰나의 존재다. 있던 시기보다 무한하게 더 긴 시간을 없었던 것으로 있던 것이 바로 ‘나’이고 ‘너’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있는 것이 원래 본 모습인 것이 ‘나’이고 ‘너’이다.

 

 

어쩌면 숲 속 부는 바람으로 있다가 혹은 나뭇잎으로 있다가 혹은 흙으로 있다가 아주 잠시 ‘나’란 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지금 여기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도 아주 잠시 말이다. 그런데 그 잠시의 시간을 ‘나’는 ‘나의 것’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싸운다. 욕심을 내며 그렇게 힘들게 싸우며 살아간다. 그 싸우는 삶이 무엇이 좋다고 아이에게도 전투사가 되라고 한다. 결국 죽어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할 존재인데 말이다. 그 마지막이 정해진 존재인데 말이다.

100년을 산다 해도, 일 년이 365일이나 36,500일 밖에 살지 못한다. 100년을 산다 해도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나의 옆에 나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랑하는 이들과 웃으며 행복하게 살 시간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내 아이를 본다. 이 아이가 나이가 들어 지금을 떠올리며 무엇을 추억할까? 나의 어린 시절, 나는 친구들과 유령을 잡기 위핸 ‘고스트 버스터’를 조직했다. 대구 중앙 도서관에 매주 토요일에 모여 우리까리 추억을 담은 신문을 만들자고 이런 저런 애를 쓰며 신문을 만들었다. 우리 용돈으로 말이다. 배구공을 던져 큰 나무의 한 곳을 스치면 점수를 주는 이상한 경기를 만들어 아이들끼리 대결하기도 했다.

더 화력 좋은 고무총을 만들고자 친구들끼리 모여 연구하기도 했다. 작은 땅에 씨앗을 뿌리고 상추와 고추를 키우기도 했다. 친구들과 중학교 때 작은 통기타 모임을 만들었고 이후엔 록 밴드를 조직해 콘서트를 하기도 했다. 시 쓰기를 좋아해 시를 자주 적기도 했다. 다시 내 아이를 본다. 나는 참 재미있었다. 내 어린 시절, 나는 무엇을 잘하기 위해 친구들과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재미였다. 목적을 두고 누군가에게 점수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나서 했다.

열심히 즐기다 재미가 없으면 그만 두었다. 참 재미있었다. 그런데 내 아이는 지금 자신의 삶이 재미있을까? 혹시 이 힘든 인생에 강력한 전투사가 되어 승리감에 즐기게 하기 위해 아이에게 삶의 재미보다 싸움의 기쁨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것’을 더 챙기라고 지금은 즐기지 말고 나중에 즐길 수 있으니 지금은 열심히 싸우라고 아이에게 말해야할까?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면 거기에 다 있다는 무위당 장일순의 말을 생각해본다. 채우고, 채우고 또 채우면 그 채워진 자리에 남은 것은 더 채우고 싶은 마음이다. 그 마음에 다시 싸우러 간다. 힘들다. 이기고 돌아와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더 강한 무엇에 불안하고, 약해지는 자신에 불안하다.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면 거기에 다 있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싸움에서 이기자는 욕심 버리고 밤하늘 빛나는 별을 보며 윤동주의 시를 나누고 길가 잡초를 보며 권정생의 동화를 나눈다고 나와 내 아이의 삶은 무능과 패배로 가득하게 될까? 너 없이 나 없고 나 없이 너 없다는 장일순의 글처럼 나와 싸워야하는 너가 아닌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너, 너와 더불어 살아가는 나의 세상은 무능과 패배로 가득한 나약한 공간일까?

내 어린 시절, 나는 나름 고마운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과거의 추억 속에서 미소 지우며 행복하다. 내 아이는 더 행복하길 바란다. ‘나’보다 더 ‘나의 아이’가 장일순의 말처럼 더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우면서 살아가길 바란다면 나는 나쁜 아빠인가? 찰나를 살아가며, ‘나의 것’도 아닌 것을 ‘나의 것’이라며 싸우는 세상에서 참 못된 행복으로 웃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행복을 이야기하는 나는 나쁜 아빠인가?

곧 수능이고 입시철이다. 나는 나쁜 아빠이고 싶다. 

<유대칠 님은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면서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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