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사들에 관한 이야기
어떤 의사들에 관한 이야기
  • 신승건
  • 승인 2018.11.0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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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건의 서재>

지금 독일 프랑크푸르트 상공을 지나고 있다. 30분 전쯤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그 직전에 낯부끄러운 의료계 기사를 하나 접했다. 스마트폰 화면을 위로 튕겨가며 잠깐 스쳐 가듯 읽은 기사였건만 그 잔상은 자리에 앉은 내내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기내에서 딱히 할 일도 없고 하여 이 기사에 내 평소 생각을 녹여 짧은 글로 풀어본다.

이야기는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던 2013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여덟 살이던 한 아이가 배가 아프다며 병원을 찾는다. 몇 가지 검사를 마친 의료진은 복통의 원인을 변비로 진단하였다. 하지만 복통은 호전되지 않았고 이 아이는 총 네 번에 걸쳐 같은 병원을 찾는다. 그때마다 의료진은 변비라는 기존 진단을 유지한다.

 

 

하지만 점차 증세가 심해지고 결국 다른 병원으로 향한다. 여기서 복통 원인이 변비가 아니라 횡격막 탈장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후였다. 결국 혈흉에 따른 저혈량 쇼크가 이어져 여덟 살 난 아이는 죽음에 이른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처음 방문한 병원에서 무려 네 차례의 진료가 이루어지는 동안 의료진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신중하게 횡격막 탈장을 의심하고 치료했다면 어땠을까. 아닌 게 아니라 엑스레이에 이미 흉수가 차오른 게 보였다고 한다. 어쩌면 이 아이는 다시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안타깝다고 하기엔 슬프고, 그저 슬프다고 하기엔 분한 이유다.

며칠 전 사법부는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의사 3명에게 금고 등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을 단행했다. 의사들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 어린이가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이 판결을 두고 의사 사회가 격렬하게 반발하는 모습이다. 급기야 대한의사협회는 파업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의사가 최선을 다해 치료했다면 그 결과가 잘못되어도 의사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죽이려고 죽인 게 아니니 적당히 봐달라는 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의사에게는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일을 둘러싸고 우리나라 의사들이 이 세 가지 도리를 철저하게 저버린 민낯을 보게 되어 마음이 무척 서글프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의사의 세 가지 도리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전문가’로서의 도리다. 전문가라면 모름지기 결과로 말해야 한다.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든다고 일류 요리사가 아니다. 미식가들도 만족시킬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어야 일류 요리사다. 소설가라면 국제적인 상을 받거나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정도, 미술가라면 유명 미술관에 그림을 걸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명실공히 그 분야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당신은 왜 가족이 큰 수술을 해야 할 때, 사돈에 팔촌까지 동원해 서울대병원이나 삼성, 아산 병원의 교수 중 누가 그 분야 일인자인지 알아보는가. 큰 병원의 의사가 더 정성스럽게 치료해줄 것 같아서일까. 자기 병원에 밥줄이 걸려있는 동네 개원의가 환자를 더 정성스레 보지 않을까. 당신이 큰 대학 병원 의사를 찾는 건 그들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큰 병원 의사에게서 기대하는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다.

이처럼 나와 당신 모두 이미 과정보다 결과를 기준으로 전문가를 선택한다. 전문가를 평가함에 있어서 그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그걸 부정하는 게 위선이다.

“열심히 했는데”라는 말에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논리가 숨어있다. 어떤 일을 취미로 하거나 아니면 학생일 때는 괜찮다. 하지만 전문가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아니, 통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겠다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인 의사가 “열심히 노력했는데” 따위의 말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다음 두 번째는 ‘의사’로서의 도리다. 이는 타인의 불안을 기꺼이 대신 감당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번 판결에 반발하는 의사들은 “이렇게 의사들의 실수를 처벌하면 앞으로 안심하고 진료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의사는 자기가 안심하려고 있는 직업이 아니다. 안심은 환자와 보호자의 몫이다.

의사는 다른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대신 불안을 감당하는 직업이다.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삶이 망가질까 봐 불안하다. 이 불안을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대신 고민해서 해결해주는 게 의사의 역할이다.

하지만 의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다. 그러므로 항상 긴장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의사의 불안은 불가피하며 어떤 면에서는 필요하기도 하다.

의사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존중은 환자의 불안을 해결하는 의사 본래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때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하물며 의사 자신이 안심하고자 환자를 불안하게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만약 의사가 안심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당장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게 맞다. 그게 의사와 환자 모두가 서로 행복한 길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다. 인간이라면 슬픈 일을 보고 슬픔을 느끼고 안타까운 일을 보면 안타까움을 느껴야 한다. 이를 측은지심이라고 한다.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역지사지라고 한다. 측은지심과 역지사지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의 기본이다.

지금 의사들은 동료의 처벌을 이유로 실력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의료사고로 희생된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권익이 조금이라도 손상될까 봐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도,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잃은 아이를 기리는 건 흉내조차 내지 않는다. 그들은 적어도 죽은 아이에 대해 한 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가졌어야 했다. 처벌에 반대하는 팻말을 들기 전에 그 아이를 위한 묵념이라도 해야 했다.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같은 하늘 아래서 이 의사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자기 아이를 죽인 의사를 두둔하는 다른 의사들의 모습을 보며 그 부모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의사들은 자기 아이가 그렇게 희생되었어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잔인하리만치 공감 능력이 말살된 의사들의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남에게 가해서는 안 된다. 정말로 그래서는 안 된다.

물론 의사도 사람인지라 완벽할 수 없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의사라고 항상 완벽한 결과를 낼 수 없고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세 번째 ‘인간의 도리’만큼은 우리 의사들이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의료사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의사도 인간이기에 못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이다.

한 초등학생이 세상이 무언지 채 알기도 전에 의료사고로 봄날의 새싹 같은 여린 삶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 아이의 가족들도 보고 있을 뉴스를 통해 “동료를 처벌하지 말라”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의사들의 모습이 전파를 타고 있다. 같은 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한 없이 부끄럽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다.

의사를 대표한다는 사람은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자 삭발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그 정도의 결단력을 다른 방향으로 쓸 수는 없었을까. 차라리 사람들 앞에 정중히 고개 숙이며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를 대신해 내가 하련다.)

“저희 의사들의 잘못으로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아이의 명복을 빌며, 그 남겨진 가족에게 마음을 다해 저의 슬픔과 위로를 전합니다.” <외과의사>

 

<신승건의 서재 https://shinseungke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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