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길’을 걸었다, 한없이 쓸쓸해졌다
‘고종의 길’을 걸었다, 한없이 쓸쓸해졌다
  • 정다은 기자
  • 승인 2018.11.12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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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개방한 ‘고종의 길’과 정동길

아관파천의 아픈 역사를 가진 ‘고종의 길’이 지난 10월 30일 개방했다. 서울 중구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건너편부터 정동공원을 거쳐 옛 러시아공사관까지 이어지는 120m의 길이다. ‘덕수궁 돌담길’이 이제 완전히 개방되는 것이다.

 

미국 대사관에서 '고종의 길'로 가는길
미국 대사관에서 '고종의 길'로 가는길

 

난리를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뜻의 아관파천.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의 한문표기다. ‘파천’은 도망간다는 뜻인데,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 언론에서 깎아내리며 그렇게 불렀다. 구미 해외 언론은 ‘망명’(asylum)으로 표기했다. 우리 실록에는 왕이 거처를 옮긴다는 뜻의 ‘이어’(移御)라고 썼다.

 

고종의 길 입구
고종의 길 입구

 

1896년 늘 위협을 느끼며 살던 고종. 조선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던 러시아가 안전을 보장하겠다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권유했다. 당시 일본군이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 고종과 왕세자가 거처를 옮겼다. 그 길을 ‘고종의 길’이라 부르게 됐다. 이 길은 우리에게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1800년대 후반 덕수궁은 일제강점기 이후 규모가 축소돼 현재와 같이 작은 궁의 모습이 됐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후 원래의 궁터는 일본, 미국 등에 대사관과 저축은행 부지로 활용되며 훼손됐다. 선원전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이 들어섰다. 그러다 2011년 한·미 정부의 합의에 의해 미국과 토지교환이 이뤄졌고, 우리나라의 소유가 돼 복원할 수 있었다.

 

단풍아래 하교하는 아이들
단풍아래 하교하는 아이들
덕수궁 대한문 앞
덕수궁 대한문 앞

 

시청역 2번 출구로 나간다. 낙엽이 쌓인 거리. 얼마가지 않아 덕수궁 입구에 다다랐다. 서해수호 순국장병 합동 분향소와 3.10항쟁 애국열사 분향소가 보인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앞. 항상 그렇듯 많은 사람들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외국인이다. 드문드문 젊은 한국인들도 보인다. 기자의 목적지는 덕수궁 안이 아니기에 돌담을 타고 길을 따라 주욱 걷는다. 단풍 구경하기 좋은 길로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다. 샛노란 은행나무들과 빠알간 단풍들이 돌담과 어우러져 곳곳이 명소다. 관광 온 외국인들, 데이트하는 커플, 하교 중인 학생들, 산책 중인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하나같이 핸드폰과 카메라를 들고 풍경을 사진에 담는다.

 

한적한 정동공원
한적한 정동공원

 

돌담길 건너편 길에선 ‘덕수궁 페어샵’이 열렸다. 사회적 경제기업과 청년 창업자, 핸드메이드 작가들이 함께 만드는 도시형 사회적 경제 마켓이다. 가방, 향초, 디퓨저, 식기, 식품, 의류 등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다. 단풍 구경 하랴, 마켓 구경하랴 바쁘다.

덕수궁 담장 일부분을 보수공사 중이다. 공사하는 담을 타고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경찰들이 서있는 골목을 타고 올라간다. 경찰들이 지키는 곳은 미국 대사관저다. 더 올라가면 작은 문이 보인다. 얼핏 보면 여느 집 대문 같다. 경찰들이 서있고 안내판을 발견해서 망정이지 빠르게 지난다면 그곳이 어떤 곳일지도 모를 것 같다. 문으로 들어간다. 여기가 바로 ‘고종의 길’이다.

 

고종의 길
고종의 길
공사가 이어지고 있는 고종의 길
공사가 이어지고 있는 고종의 길

 

‘고종의 길’은 매주 화요일~일요일에 개방되고 월요일은 닫는다. 개방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입장마감 오후 5시 30분). 동절기(11월~1월)엔 오전 9시~오후 5시 30분(입장마감 오후 5시)이다.

한쪽에서 벽을 쌓는 공사가 이어지고 있다. 걷다보니 이 터의 옛날 모습들을 사진으로 전시해놓은 공간이 나온다. 공사 중인 벽 뒤쪽으로 조선저축은행 사택이 있다. 지난 8월 한달 간 일반인들에게 공개됐었다. 이제 선원전 복원을 위해 철거될 것이다. ‘고종의 길’에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다. 새로 쌓아올린 돌담길이 옛 러시아공사관이 있는 정동공원으로 이어진다. 이 길에 얽힌 역사가 설명돼있으면 좋을 것 같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여기에 얽힌 역사를 모른다면 그저 한낱 돌담길일 뿐이다.

 

공사중인 벽 뒤쪽으로 조선저축은행
공사중인 벽 뒤쪽으로 조선저축은행

 

정동공원은 산책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한적하다 못해 조금은 공허한 느낌이다. ‘고종의 길’을 통해 와서인지 조용한 정동공원과 옛 러시아공사관의 모습이 더욱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정동공원 입구에 정동길의 역사를 설명한 안내판이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 안내판을 천천히 읽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옛 러시아 공사관
옛 러시아 공사관

 

정동공원에서 나와 정동길로 내려오니 예원학교와 이화여고가 보인다. 하교를 한 아이들이 단풍을 배경삼아 꺄르륵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상반된 분위기다. 뼈아픈 역사가 있었기에, 이를 이겨내기 위해 싸워온 우리의 조상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 아이들이 이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푸르른 가을하늘 아래 울긋불긋 물든 단풍은 아름답고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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