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병을 잃었다, 마음이 다시 가벼워지고 있었다.
와인 한 병을 잃었다, 마음이 다시 가벼워지고 있었다.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8.11.15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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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열여덟 번째 이야기 / 강진수

 

 

35.

땅거미가 질 무렵, 우리는 수많은 선인장들을 지나 사막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오늘의 숙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우리처럼 사막을 떠도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도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여행객들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으로 캐나다, 미국 순이었다. 동양인들은 나와 형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투어가 전부 스페인어나 영어로 진행되는데 있어서 아마 아시아 여행객들은 부담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아시아인은 늘 소수여야 한다는 두려움과 강압감에 유럽인 위주의 투어를 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형과 나는 그런 두려움이나 부담감 따위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우리 팀원들과 더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었다.

 

 

식사부터 하겠다는 가이드의 안내에 씻지도 못하고 짐만 내려놓은 채로 홀의 테이블에 앉았다. 각기 다른 팀을 데려온 가이드들은 다들 아는 사이인지, 여행객들의 음식을 준비하는데 서로 돕고 꾸려나갔다. 가이드들이 일일이 상을 차려주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우리 팀은 테이블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초면에는 실례가 될 것 같아 묻지 않았던 서로의 나이라든가, 사는 나라와 지역에 대해서 얘기하고 사적인 질문도 나눴다. 그러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독일 사람들과 프랑스 사람들도 우리에게 슬쩍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마 자기네들 팀이 별로 활기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 팀에는 독일에서 온 에이미, 스위스에서 온 라리샤와 로게르 역시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아 그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 나와 형, 레오만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괜히 옆구리도 찔러보고 장난치면서 우리끼리 또 대화를 나눴다.

 

 

가이드가 음식을 들고 테이블로 왔다. 차례로 접시에 음식을 담아주기 시작했다. 식사 메뉴는 간단한 스프와 스파게티. 따로 요리사가 없이 가이드들이 해주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요리를 기대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이미 오랜 바깥 활동으로 지치고 굶주려 있던 우린 무엇을 준들 맛있게 먹어치울 자신이 있었다. 음식을 전부 나누어준 가이드는 씨익 웃어 보이며 와인 한 병을 가져왔다. 오늘 고생한 우리들을 위한 선물이라는 것이다. 허겁지겁 접시를 비우던 우린, 일동 정지한 상태로 와인을 황홀하게 바라봤다. 지친 육신을 한순간에 풀어줄 와인이라니, 심지어 소금 사막 한 가운데에서 마시는 와인이라니! 황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일어나 신나게 춤사위를 벌이며 “Gracias(고맙습니다)”, “Muy Bien(최고예요)”를 남발했다.

 

 

역시 밥상에 술이 생기자 피로를 집어던지고 생기발랄함을 되찾았다. 온갖 농담과 우스운 표정, 익살맞은 몸짓들이 테이블 위를 오고갔다. 그런 분위기 속에 와인 한 병 정도야 금방 떨어지고 마는 것. 숙소 입구에 있는 매점에 맥주를 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로게르. 주도적으로 우리의 돈을 모아 맥주를 사왔다. 그제야 마음 놓고 우리 팀만의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다른 팀들도 우리의 분위기를 매우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이 날의 우연한 맥주 및 와인 파티는 우리 팀을 견고히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어느 팀보다도 서로를 챙기고 위하는 우리 팀만의 분위기가 투어 끝까지 우리를 감돌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때 생겨난 우리의 유대가 우유니를 넘어서까지 지속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36.

다음날 새벽부터 우리는 다시 지프에 짐을 실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지만 부지런히 움직여야 우유니의 포토시 국립공원에 도착할 수 있다. 그곳은 플라밍고의 대량 서식지로, 그 풍경 역시 상당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우리 팀 중에 라리샤가 플라밍고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나머지 그제부터 플라밍고 노래를 불러 그 기대가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지프를 타고 다들 피곤한 몸을 어떻게든 뉘여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라리샤는 그 기대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는지 신난 몸짓이다.

 

 

해가 뜨고 아침이 밝자 지프가 잠깐 멈췄다. 멀리는 돌산이 보이고 온통 물웅덩이와 푸른 풀이 자라는 땅이었다. 가이드가 손짓을 하자 우리를 향해 귀를 쫑긋 세우며 경계하는 라마들을 볼 수 있었다. 라마가 한두 마리가 아니라 정말 떼를 지어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라마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손에 닿을 만큼 다가가자 라마들은 폴짝폴짝 뛰어 도망갔다. 우리도 라마 흉내를 내며 질퍽거리는 땅을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작은 마을에 들러 아침식사로 간단한 요기를 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가게가 있기에 우리 팀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오늘 밤을 위한 와인을 3병 샀다. 술에 있어서는 어쩌면 다들 그렇게 마음이 잘 맞는지, 다툼 한 번 없이 다들 자발적으로 갹출을 하곤 했다. 지프 뒷좌석에 앉는 나는 와인관리를 맡았다. 비포장도로를 마구잡이로 달리기 때문에, 지프가 엄청 흔들리므로 병이 깨지지 않도록 와인을 관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하지만 술을 피처럼 아끼는 나이기에, 모두가 안심하고 와인을 맡길 수 있었달까.

문제는 그 이후부터 내 컨디션이 급도로 안 좋아졌다. 아무래도 일종의 정서적인 문제이거나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옆에 있는 형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했고, 활발하던 내가 어느 순간 시무룩해 조용히 지프 구석에서 찌그러져 있는 것을 보고 팀원들이 하나 둘 걱정해주기 시작했다. 참 이유를 알 수 없는 히스테리였는데, 안 그래도 여행 중간 중간에 나의 이런 모습으로 형과 마찰을 빚곤 했다. 나를 잘 아는 형도 괴로워하는 문제였는데, 먼 외국에서 와 이렇게 모인 친구들이 어떻게 나를 이해할까. 점심시간이 되자, 가이드가 지프 트렁크를 열고 야외 식사를 준비해줬다. 나는 친구들에게 괜찮은 듯 웃어 보이며 괜히 이런저런 포즈도 취하고 친구들과 사진도 찍어보았다. 식사도 얼른 마치고 눈앞에 펼쳐진 아주 아름다운 호숫가를 혼자서 천천히 산책해보기도 했다. 심지어 내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큰 소리로 호수를 향해 노래를 불러대기도 했다. 맑은 물빛의 호수에는 플라밍고 몇 마리가 몸을 씻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몸을 씻고 싶었다. 몸을 깨끗이 씻고 나면 나의 마음이 한결 나아질까.

 

 

다시 한참을 달려 지프는 포토시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우리의 숙소는 포토시 국립공원 바로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숙소부터 들러 짐을 풀기로 했다. 나는 애지중지하던 와인들을 들고 내리려는 순간, 지프의 높이에 균형을 잃어 와인 한 병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와인이 핏물처럼 처참히 부서져 쏟아졌다. 나의 얼굴은 화끈화끈 달아오르며 미안해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친구들도 형도 다들 내가 다친 것은 없느냐고 그럼 됐다고 말해준다. 결국 사고를 치는구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는데 에이미가 그랬다. 많이 힘들어보여서 다들 걱정했는데 크게 다치는 일 없었으니 참 다행이라고.

그때의 감정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이 먼 외지에 와서도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구나. 그러니 혼자 앓을 필요가 없구나. 와인 한 병을 잃은 대신 마음은 다시 가벼워지고 있었다. 우리 팀 모두의 도움으로, 나는 다시 그들의 친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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