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박석무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의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런 고난의 시절에 단 하루 편안하게 쉬지도 않고 낮과 밤을 구별도 않은 채 학문만을 연구하여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에서 9년의 긴 세월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 역시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마음을 놓지 않고 학문을 연구하고 서도(書道)에 정진하여 뛰어난 경학자이자 탁월한 추사체를 완성해낸 대서예가가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우리 조선이 자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학자이자 예술가로는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다산과 추사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산의 학문과 철학 및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이미 굳어진 사실이지만, 추사는 대체로 서예가로만 더 많이 알려졌는데 최근 학자들 노력으로 다산 못지않은 경학자임을 세상에서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기이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전에 저는 『다산기행』(1988)이라는 저서를 통해 다산의 유배지를 찾아다니며 다산의 행적을 살피면서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소개를 한 바가 있습니다. 30년이 지난 2018년인 올해 치과의사로 수원에서 개업하고 있는 임병목 박사는 추사의 유배지를 찾아다니면서 추사의 행적을 살피고, 그의 서예작품의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려는 노력의 결과로 『추사기행』(2018)이라는 책을 간행했습니다. 

저는 다산의 유배지였던 경북 포항 곁의 장기를 찾아 헤매었으나 다산의 손때가 묻어있는 어떤 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18년의 강진 생활을 살피면서 알아낸 것은 다산초당 서편의 절벽에 새긴 ‘정석(丁石)’이라는 두 글자는 유일하게 다산의 손때가 묻어있는 유품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초당이건 또 어떤 것도 모두 새로 개축한 건물이어서 다산의 흔적이 직접 깃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비록 새기기는 석수의 손을 빌렸겠지만, 그 글씨는 다산의 친필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임병목 박사는 제주도 일대를 모두 뒤졌으나 어디에서도 추사의 친필은 찾지 못하다가, 암벽에 새겨진 ‘영천(靈泉)’이라는 두 글자를 여러 가지 고증을 통해 추사의 친필임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 ‘영천’의 탁본을 가지고 와서 저에게 설명해주는데 너무나 정확한 사실이어서 그동안 없었던 추사 글씨 두 글자가 세상에 나타난 셈입니다.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내용인즉, 어떤 유학자가 제주도의 방선문 아래 한천의 석벽에 추사글씨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추사 제자의 후손들도 알고 있던 사실인데, 그 두 글자를 찾아낸 임 박사는 객관적인 자료로 추사 글씨임을 고증해냈다고 합니다. 

강진 전체의 유적지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존재하는 ‘정석’, 제주도 전체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영천’, 조선 최고의 두 학자의 글씨가 생생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요. ‘정석’이야 정 씨의 돌임을 새겨서 흔적을 남긴 일인데, ‘영천’은 샘물로 씻어서 안질이 나았다는 제자의 이야기를 듣고 추사가 신령스러운 샘물이라는 뜻으로 써준 글씨라고 기록에 나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옛것을 찾아 헤매는 임 박사의 정신도 좋지만, 우리들 모두 그런 유품이나 유물에 대한 관심을 더 기울이는 일이 우리 문화와 역사를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요. ‘정석’과 ‘영천’, 어찌하여 그렇게 귀한 유물로 남아있는 것인지 귀중하게 여겨야겠습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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